년 전, 아침 은빛 햇살을 가로질러 김포공항에 내린 날이었다. 시내로 들어서기 전 시원한 해장국 생각과 함께 별안간 화곡동엘 가보고 싶었다.
20년도 훨씬 전, 토요일 오후 퇴근길이면 새로 지은 집들 울안의 목련들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담장 넘어 활짝 웃는다. 반듯한 골목을 돌면 멀리 엄마 품에서 벗어난 돌 지난 우리 막내가 함박 웃음으로 뒤뚱거리며 달려오곤 했다. 나도 넥타이 풀어 주머니에 넣고 마주 달려간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아기를 안아 올리면 숨가쁜 입에서 새어나오는 그 젖내, 어디에도 내게 그런 행복한 동네는 없다. 이제 화곡동에서 살던 집 찾기란 서울에서 김서방 집 찾기다. 집들은 더욱 총총히 스크람을 짜고 곧 함성이라도 지르며 터질 듯 싶다. 고향에 돌아왔지만, 아직도 고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던가.
미국으로 떠나온 후, 새로 뿌리를 내린다는 명목으로 그 세살박이 아이는 뒷전이었다. 새벽에 돌아와 쓰러져 자고 있으면, 깨워 보았자 화부터 낼 아빠 눈치를 보면서도, 주위를 맴돌던 막내, 지금은 그런 노래가 다 있느냐고 도무지 기억나질 않는다는 “기차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를 주막집 아가씨가 억지로 부르듯 막내는 모처럼 웃는 아빠의 얼굴 보기 위해 수줍음을 참아내며 몇 번이고 불러 제겼다.
저녁 일을 가기 위해 외갓집에 내려놓으면 두살 터울인 제 형은 손 흔들고 돌아서지만 막내는 들어가라고 손짓해도 그냥 서 있었다. 한번은 차를 세우고 모퉁이를 다시 돌아 가보니 아이는 차가 사라진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뜻밖에 아빠가 나타나자 잘못하다 들킨 아이처럼 놀라 서 버렸다. 손을 벌리니 달려와 덥석 안기며 목을 바싹 껴안는, 아이 볼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여자아이를 바라다 낳아선지 영락없이 해맑은 계집아이였다. 한번은 상점을 다녀 나오는데 백인부부가 귀엽다고 사진을 찍어 준 적도 있다. 초등학교 때는 빨간 가죽 잠바를 사달라더니 마이클 잭슨의 춤을 멋들어지게 추곤 했다. 정말 자랑하고 싶은 춤 솜씨였다. 박장대소하고 나면 아이는 신나서 더 추곤 했다. 비록 연극에서 움직이지 않는 풀잎 역에도 엄마만 보고 있으면 만족한다던 어느 수필처럼. 물론 지금 막내는 그런 소리 어디 가서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고등학교 때는 풋볼 팀으로 졸업 때까지 해내더니 건장한 체격으로 이목구비도 남자다워졌다. 막내는 아침에 학교 갈 때면 새가 모이 쪼듯 선반의 돈이 담긴 통에서 점심값을 가져가곤 했다. 가게에 불이 나서 쉬던 때였다. 풋볼연습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신발 벗기 무섭게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알고 보니 일이 없어진 아빠를 위해 점심값을 반으로 줄여 꺼내 가기로 혼자 결정한 거였다.
비가 오던 날 밤 아이가 일하는 수퍼마켓엘 가보았다. 널따란 파킹장에는 그 아이 혼자였다. 그 많은 샤핑카트를 끌고 오다가 우리를 보고 피식 웃던 젖은 얼굴이 지금도 기억된다. 중고등하교 때는 친구와 운동에 빠져 있던 아이가 대학가서는 제대로 공부를 시작했다. 모든 게 때가 있는 건데, 같이 있고 싶어하는데도 공부하라고 방으로 몰아 넣던 일들이 지금은 가슴 아프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면서도 아이는 함께 살아주었다. 한국어를 강조하는 아버지와는 대화도 없어지고 곁에 와서 앉는 일도 없다. 어느 날은 한마디 대화도 없이 지낸다. 그래도 집안 어디에 아이가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그 아이가 기댈만한 아버지 노릇을 못한 것이 요즈음은 정말 미안해진다. 정말이지 다시 되돌릴 수만 있다면 너그럽고 정 많은 아버지 노릇을 해주고 싶다. 지금은 그리하려는 나를 오히려 부담스러워 한다.
요즈음 편한 자리에 갈 때면 아이의 옷을 몰래 꺼내 입고 간다. 막내의 크고 넉넉한 옷을 입고 있으면 나온 배도 가려지고 아이의 숨소리도 느낀다. 화곡동 골목을 돌아 달려오던 포근한 젖내도.
막내는 다음주엔 새로 산 집으로 나간다. 내가 화곡동 집을 처음사서 가정을 꾸리듯 훗날 새집에서 저를 닮은 아이를 낳아 아버지가 되겠지. 언젠가 막내는 "내 아이들과는 친구처럼 지내고, 집안에서는 한 언어를 사용할래요"라고 했다. 할말이 없어진 내가 안되어 보이는지 한마디 보태고 일어섰다. "제가 코리언 아메리칸인 건 한번도 잊은 적이 없어요, 대디"
큰아이는 대학교 때부터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그 아이는 다 커서도 ‘대디’다. 그러면서도 이제 자기를 어른 취급해 달라지만 그 아이는 내 나이가 된다해도 내겐 영원한 막내다.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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