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타겟으로 대대적 테러를 감행하라. 잠깐…, 미국이 가만히 있을까. 걱정할 것 없다. 기껏해야 소송이나 하겠지.” 아랍 테러리스트들이 내린 결론이었다고 한다. 한 어린이가 공원 미끄럼틀에서 놀다가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부모들은 소송을 제기했다. 공원에서 미끄럼틀은 사라졌다. 시이소어는 오늘날 추억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종이 됐다. 그네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남가주의 한 교육구는 운동장에서 뛰는 것을 아예 금지하고 있다.
왜. 미끄럼틀이 사라진 것과 같은 이유다. 소송이 무서운 것이다.
환자가 두통을 호소한다. 아스피린 한 두 알이면 된다. 의사는 그러나 엄청난 비용이 드는 검사를 권한다. 미국의 상품을 보면 소비자는 모두가 마치 저능아 같아 보인다. 너무나 당연한 당부를 하는 문구들이 부착돼 있어서다. 왜 과잉 서비스인가. 소송이 무서워서다.
라스베가스 일대에서는 산부인과 의사 보기가 힘들다. 거의 절반이 이 지역을 떠났다. 왜. 소송 때문이다. 이 지역 산부인과 의사의 76%가 소송을 당했다. 그 중 40%는 세 차례 이상 소송을 당했다. ‘공직은 사유재산이다’-. 무슨 소리냐고. 현실을 보자. ‘무능’으로 판정된 교사를 해고하는 데 근 20만달러가 든다. 뉴욕의 경우지만 다른 주도 상황은 비슷하다. 거기다가 수년씩 걸린다. 역시 소송 때문이다.
“미국인이란 상식적 판단을 유보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소송이 겁나서다.” 생활의 일부가 된 소송, 소송만능주의 세태와 관련해 나온 비판이다. “소송은 글쎄, 뭐라고 할까… 잭팟이라고 해야 맞겠다. 한 번 터지는 날에는 수억달러가 왔다갔다하는 판이니까.” 소송에 대한 일반 인식이다.
인종(Politics of Race)이 한때 정치의 주 아젠다로 떠올랐었다. 그러자 계급(Politics of Class)이, 그리고 성차별(Politics of Gender)이 차례로 주 정치현안이 됐다. 이와 함께 미 사법부의 흐름도 변했다. ‘행동주의적 사법부’(Judicial Activism)의 대두다.
60년대 민권운동 때부터 두드러진 현상으로 법원은 법에 대한 소극적 해석 차원을 넘어 법리를 창의적으로 해석해 사실상의 새로운 법을 만드는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 결과 사회정의 차원에서 많은 이정표적 판례가 나왔다. 민권운동의 승리도 어찌 보면 바로 ‘행동주의적 사법부’가 있으므로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 행동주의적 사법부는 계속해 소비자문제, 환경문제 등도 파고들었다. 그리고 미국 사회를 변화시켰다.
그러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소송만능주의 만연이 그 대표적 병폐다. 그리고 모든 게 소송거리인 세상이 된 것이다. 한 교회가 카운슬링 프로그램을 중지했다. 이유는 이렇다. 교인 한 사람이 자살을 했다. 그런데 교회가 소송을 당했다. 이후 그 교회는 카운슬링을 중지한 것이다.
패스트푸드 체인이 소송을 당했다. 프렌치 프라이가 살찌게 하는 음식임을 경고하지 않았다는 게 소송의 사유다. 이 소송은 어쩌면 미국 정치의 아젠다가 바뀌고 있다는 암시로 볼 수도 있다. 그 아젠다는 다름 아닌 비만문제(Politics of Fat)다.
모든 유행을 선도하는 캘리포니아에서 전개되어온 운동이 바로 뭔가 ‘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비만으로부터 해방’ 움직임이 그것으로 ‘비만을 질병으로 규정’하자는 게 이 운동의 골자다.
이들의 아이디어는 이렇다. 비만은 질병이다. 체중감소는 따라서 병 치료다. 감량 다이어트에는 그러므로 감세 혜택이 부여돼야 한다. 그들의 논리는 계속 이렇게 이어질 수 있다. 비만은 질병이므로 살찌게 하는 음식은 질병전염 매개체다. 그리고 이런 질병 매개체 공급자는 소송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패스트푸드 체인을 상대로 한 소송은 바로 그 시작일지 모른다. 그리고 바야흐로 미국은 소송 홍수사태를 맞을 전망이다. 다음 소송 타겟은 각종 다이어트 프로그램이 될 수도 있다는 예상에서다.
갖가지 다이어트 프로그램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맞는 프로그램은 없다. 상황에 따라 역효과도 날 수 있다. 그러므로 소송 다발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만문제로 미국은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한 전쟁에 돌입할 가능성도 엿보인다는 것.
그 결과는 뭘까. ‘내 잘못은 결코 아니야’라는 병폐적 멘탈리티의 만연이다. ‘나의 의지박약’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살찌는 것도 남의 탓이다.
그 대가는 엄청나다. 소송과 관련된 물질적 손실도 손실이지만 모든 게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조가 만연할 때 그 사회는 정신적 공황을 맞을 수도 있어서다.
‘소송이 두려워 상식적 판단을 기피하는 사회’-. 이게 어디 남의 동네 이야기만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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