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식증 이 양: 산타모니카 지역 명문사립고교에 재학중인 이모(16세) 양은 최근 5개월 동안 생리를 거른 사실을 어머니가 알게 돼 산부인과를 찾아갔다가 정신과 상담을 권유받았다. 신장 5피트3인치(162cm)에 82파운드(37kg)의 체구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마다 3마일씩 러닝을 한 후 꼬박꼬박 체중을 재는 이 양은 헐렁한 옷으로 마른 몸을 가리고 지내면서도 늘 자신이 뚱뚱하다고 생각한다. 상위권 성적유지와 과외활동에도 열심을 보이고 매사에 완벽을 추구하는 책임감 강한 학생이어서 정신과 상담이 필요한 지경인 것을 가족 아무도 몰랐다. 이양은 1년전 까지만 해도 정상적인 식사를 했고 체중도 90∼92파운드(41∼42kg)정도를 유지했었는데 "조금만 빼면 예쁘겠다"고 한 친구의 무심한 한마디에 다이어트를 시작, 야채 외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조금 많이 먹었다 싶으면 곧장 손가락을 입에 넣어 토해내고는 한 알 정량인 변비약을 세알씩 먹었다. 요즘은 음식만 보면 겁이 나서 어머니에게 방에서 먹겠다며 음식을 가지고 들어가 아예 변기에 넣고 틀어 버리곤 한다. 이제는 머리카락도 많이 빠질 뿐 아니라 토할 때마다 올라오는 위액 때문에 치아와 손톱도 심하게 상했다. 소아정신과에서는 거식증(신경성 식욕부진증·Anorexia nervosa)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대식증 조 양: 조 모(21세·여) 씨는 현재 UCLA 4학년에 재학중이다. 신장 5피트(164cm), 체중 126파운드(57kg), 체지방율 23%로 정상이지만 문제는 체중이 널뛰기를 한다는 것. 조금 많이 먹고 신경을 안 쓰면 금방 20파운드가 늘고, 안 먹거나 먹은걸 토해버리고 운동을 하면 금새 104파운드(47kg)까지 내려간다. 이번에도 2개월만에 22파운드가 늘어 병원을 찾게 됐는데 문제의 시작은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9학년 때부터 통통해 지기 시작, 10학년 때 145파운드(65kg)까지 체중이 늘자 음식을 줄이고 수영, 에어로빅, 조깅 등 닥치는 대로 운동량을 늘렸더니 1년 만에 128파운드(58kg)로 줄었다. 그 후 설사약과 이뇨제를 사용하고 음식을 먹자마자 토해 내는데도 금새 제자리로 돌아오는 체중은 일주일만에 5∼6파운드까지 오르락내리락 하기 수차례. 1년전 부턴 낮에는 아예 식사를 거르고 참다가 모두가 잠든 밤이 되면 은밀히 먹기 시작, 12시부터 새벽 3시까지 배가 아플 때까지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고는 몽땅 토해내는 행사를 매일 밤마다 한바탕씩 한다. 한번에 먹는 양은 약 5,000kcal.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먹고는 토하러 갈 땐 기어간다며 이젠 이 난리를 밤마다 치르지 않고는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라고 고백한 조양의 상태는 대식증(신경성 과식욕증·Bulimia Nervosa)이다.
폭식증 김 양: 올가을 대학에 가는 김 모(17세)양은 신장 4피트8인치(160km)에 체중159파운드(72kg)의 비만이다. 시험 때가 되거나 그룹프로젝트가 있을 때, 또 부모님과 다투고 나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음식을 먹어댄다. 2년 전부터 스트레스를 받거나 속이 상하면 음식을 먹음으로써 자신의 뒤틀린 심사를 다스리는 것이 습관이 돼버렸다. 중학교 때까지 공부를 잘해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졸업식땐 거의 모든 상을 휩쓸었던 김 양은 고등학교에서 성적이 떨어지자 매사에 신경질을 부리고 그 때마다 먹어대면서 살이 찌기 시작해 비만이 됐다. 지금은 성적이 부진해 원하는 대학보다 한참 낮춰가야 하는 처지에다 뚱뚱해진 자신이 혐오스러운 김양은 또 한편으로 학업에 신경을 써 줘야 하는 시기에 일에만 몰두한 부모가 원망스럽고, 부모가 자신을 무시하고 창피해 한다고 생각한다. 학업도 외모도 친구들보다 뒤쳐진 거울속 자신을 들여다보며 속상할 때마다 먹는 것으로 밖에 해소하지 못하는 자신이 점점 더 비참하고 우울해지는 김 양은 현재 폭식증(Binge Eating Syndrom)과 우울증 진단을 받고 식이장애클리닉에서 치료받고 있다.
최근 몇 년새 한인 청소년들의 ‘식이장애’(eating disorder)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식이장애란 식생활, 체중, 체형에 대해 이상심리를 보여 식습관의 이상을 초래하면서 우울증이나 신경 및 장기능 손상, 치아부식, 골밀도 약화 등 각종 합병증을 수반하며 생명까지 위협하는 병으로 주로 여성의 청소년기에 시작해 평생 지속되기도 한다. 남성 환자는 전체의 10%정도.
카이저 병원 소아정신과 전문의 수잔 정 박사(USC의대 임상부교수)는 "사회에 만연한 미적 기준에 따라 날씬해져야 경쟁력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강박관념과 취업, 성적관리, 부모의 지나친 간섭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식이장애 증세를 보이는 한인 청소년들이 최근 2∼3년새 부쩍 늘었다"며 "자녀들이 청소년기에 들어서면 부모로부터의 독립, 성숙된 동료관계의 형성, 취직, 배우자선택 등 앞으로 성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과제 앞에서 혼란과 불안에 빠지게 되고 결국 이러한 어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한 해결책으로 체형과 체중의 감량에 비현실적으로 몰두하는 행동으로 자기통제력과 자신감을 회복하고자 하는데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
최근 한국에서 서울시내 여고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4%가 식이장애 증세를 보였으며 여대생의 종류별 식이장애 유병률은 0.1%∼0.8%로 나타나 100명중 1∼8명꼴로 한가지 이상의 식이장애 증세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정 박사에 따르면 가족 중 식이장애, 우울증, 조울증 환자가 있는 가정의 자녀들에게서 유병률이 높게 나타나며 부모의 협조와 가족단위의 상담이 필요하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각종 합병증이 발병하기 때문에 반드시 전문가 치료를 받아야 한다.
■식이장애의 유형
식이장애는 크게 세가지로 나눈다. 식사를 아예 거부하는 ‘거식증’과 음식을 먹고 토하는 등 제거행동을 반복하는 ‘대식증’, 지나치게 음식을 많이 먹어 비만에 이르는 ‘폭식증’ 등이다.
▲거식증(신경성 식욕부진증·Anorexia Nervosa)
대개 14∼18세 사춘기 소녀에게 많으며 평생 이 증세를 접할 확률은 0.5%, 즉 여성200명중 1명에게서 나타난다. 대부분 청소년 환자는 음식섭취를 성행위와 동일시하며 비만과 임신을 동일선상에 파악한다. 즉 자신의 성(sex)에 대한 정체성(identity)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만과 체중증가에 대한 강박증 때문에 식사를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먹는 행위 자체를 혐오하기도 한다. 때로는 몰래 게걸스럽게 먹었다가 일부러 토해 내거나 설사약이나 이뇨제를 복용해서 배설하는 제거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체중이 감소하며 내분비계통에 이상이 생겨 3개월 이상의 무월경 증상이 나타난다.
다이어트로 체중을 20∼25%이상 줄여 정상체중의 85%에 못 미치는 피골이 상접할 정도의 마른 몸매를 유지하려 하며 최소한의 음식도 먹지 않으려 하는 증세를 보이면 거식증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 이 증세는 자신의 체중이 과다하다는 집착과 사회적 고립으로 인한 우울증이 동반되기도 하고 심하면 탈수현상과 전해질 감소로 인해 사망하기도 한다. 사망률은 연구에 따라 전체 환자의 5∼15%로 알려져 있다.
폭식증과 대식증 환자는 자신의 비정상적인 식사형태를 인정하는 반면 거식증은 자신의 비정상을 강하게 부정한다. 이 증세는 굶은 상태에서도 운동과 학교 공부에 심하게 에너지를 소모하며 불안감으로 사회적 관계를 피하기도 한다. 가정의 스트레스와 사회적 압력이 이와 같은 부조화의 원인이 될 수 있으며 대부분의 거식증은 성인으로서의 독립을 두려워하는 사춘기 소녀, 성취의식, 완벽성, 신체 외양에 높은 관심을 갖는 청소년에게서 나타난다. 주로 학력과 생활수준이 높은 가정의 책임감 강한 딸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데 자신의 몸매 관리도 잘하면서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어머니의 역할모델이 배후에 있는 경우가 많다.
▲대식증(신경성 과식욕증·Bulimia Nervosa)
가장 많이 발생하는 연령은 18세 정도며 거식증과 반대로 반복적으로 과다한 양의 식사를 하는 증세. 식사를 참았다가 폭식한 뒤 고의로 구토하거나 설사제, 이뇨제, 관장약 등 하제를 사용하는 행위를 주 1∼2회 3개월 이상 지속할 때 대식증으로 진단된다.
거식증 보다 훨씬 많아 젊은 여성의 3% 내외가 이 증상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 먹고 쏟아내므로 체중이 정상이거나 2∼3kg 이내의 변동이 있을 뿐이다. 환자 대부분이 체중과 체지방률이 정상임에도 자신의 체중이나 체형에 불만을 갖고 있다.
기분이 좋지 않거나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거나 자신의 체중이나 체형에 대해 갑자기 불만족스런 느낌이 들 때 폭식을 시작하며 먹는 행동을 조절할 수 없어 배가 불러 고통스러울 정도까지 먹어댄 후 설사약이나 이뇨제로 먹은 음식을 모두 토해내는 게 보통이고 음식물을 씹기만 하고 건더기는 넘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들 환자가 주로 먹는 음식은 아이스크림이나 케이크 등 열량이 많은 음식. 먹는 행위를 수치스럽게 여겨 가능한 남에게 들키지 않고 은밀하게 먹으려 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의 성적 매력이 어느 정도인지에 너무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에게 비교적 유병률이 높다. 증상이 심해지면 우울증과 같은 기분장애 증상이 나타나고 전해질의 불균형(특히 칼륨), 저혈당, 식도 파열상, 탈수현상, 저칼륨으로 인한 신경과 간장의 손상이 생기며 토할 때 올라오는 위산에 의해 치아와 손톱의 에나멜질이 부식되기도 하고 복통을 일으키기도 하며 뼈의 강도가 약해진다.
정신요법은 무질서의 원인을 규명하는데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대식증에 사로잡혀 있는 자기 가치와 자기 확신을 재형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폭식증(신경성 폭식장애·Binge Eating Syndrom)
주 1∼2회정도 혼자 숨어서 마구 먹는 식이장애. 폭식은 은밀히 준비해서 행해지므로 주위사람들은 환자가 다이어트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흔하고 따라서 항상 여러 가지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체중은 증가하는 경우가 많다. 대식증과 달리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하지만 증상이 반복적으로 계속되면 역시 입원치료를 받아야 한다. 대식증과의 차이는 비만이 될 때까지 폭식할 뿐 먹은 음식에 대한 제거행동이 뒤따르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식증과 거식증으로 옮겨가는 양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폭식증은 대식증이나 거식증 환자보다 치료가 쉽지만 모두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질환이다. 이처럼 식이장애는 여러가지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서 각기 다른 증후군을 보일 수 있는데 대개는 과도한 다이어트를 하다가 그 반작용으로 폭식→대식→거식증 증세로 옮겨가는 경우가 임상적으로 가장 많다.
■예방 및 가족의 역할
식이장애는 대부분 정신적으로 아직 성숙되지 못한 연령대에 발생하므로 부모나 가족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전문가들은 식이장애의 초기상태와 병적상태를 뚜렷이 구별하기 어려우므로 ‘기선제압’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무엇보다 청소년 자녀가 식사를 기피하는 등 최소한의 영양조차 섭취하지 않으려 하는 상태에 들어가기 전 미리 예방해야 한다.
수잔 정 박사는 사춘기 자녀들의 식이장애 예방법으로 평소 ▲부모의 지나친 일방적 통제를 피하고 ▲자녀가 본인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독립심을 길러주며 ▲대화를 통해 여러 가지 압박감에서 해방되도록 안정시키며 ▲자신감과 자존감을 북돋우고 ▲그룹활동을 많이 시킬 것을 권장했다.
또 체중조절을 위해 음식을 안 먹거나 약을 먹는 다이어트는 절대 금하도록 하는 대신 적당한 영양섭취와 운동을 병행토록 이끈다. 마른 체질이나 외모가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란 것을 끊임없이 일러주는 것도 필요하다.
정 박사는 또 식이장애는 특히 우울증 증세를 수반하므로 다음의 주요 우울증세 가운데 5가지 이상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며 평소 하던 일에 흥미를 잃고 기능이 저하되는 현상이 최소 2주간 지속될 때 즉시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것을 당부했다.
▲수면량의 변화 ▲식욕의 변화 ▲자살충동 또는 죽음에의 관심증대 ▲두통, 복통 등 신체적 고통호소 ▲주의집중력과 기억력 저하 ▲피로감 ▲체중의 변화 ▲죄책감 ▲지나친 동요 (agitation) 또는 처짐(retardation)
<김상경 기자> sangk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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