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증시가 끝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 한 달 여에 걸쳐 주요 주가 지수들은 중단 없는 하락을 거듭, 9·11 테러 직후 폭락했던 수준을 밑돌거나 근접해 있다. 부시 대통령이 금융개혁을 하겠다고 해도 떨어지고 미 경기 회복을 알리는 지표가 나와도 주저앉고 하는 식이다.
미 주가가 연일 이처럼 내리막길을 걷는 가장 큰 원인으로는 신뢰 상실이 지목되고 있다. 월드컴을 비롯 미 대기업들이 장부 조작 등 회계 부정을 저지른 데다 상장사와 증권 회사들이 짜고 가짜 장밋빛 전망을 내놓은 사실이 밝혀지면서 미 기업들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회계 장부 조작이나 기업과 증권사간의 유착 관계는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수년 전 비즈니스위크가 대기업 중역들을 상대로 장부 조작을 한 일이 있었느냐고 여론 조사를 한 결과 10% 이상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런 사실이 보도됐는데도 당시 활황 세에 있던 주가는 연일 오르기만 했다.
최근의 금융 스캔들은 주가 하락의 원인이라기보다 결과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그 동안 호황에 가려져 있던 온갖 문제점이 거품이 가시면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미 주가가 하락하기 시작한 것은 별다른 추문이 없던 2000년 3월부터다. 그 후 다우는 25%, 스탠다드 & 푸어 500 지수는 40%, 나스닥은 75% 하락했다. 미 주가가 이처럼 짧은 기간 동안 많이 떨어진 것은 대공황이래 처음이다.
주가 폭락으로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은퇴를 했거나 은퇴를 앞 둔 사람들이다. 2~3년 전까지만 401K와 IRA 구좌에 수십만에서 수백만 달러의 은퇴 자금을 모아놓고 세계 일주와 지중해 크루즈 등 안락한 노후 생활을 꿈꾸던 노인들 가운데 은퇴 시기를 늦추거나 은퇴를 했다 다시 취업전선에 나서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러나 주가가 더 하락할 경우 피해를 볼 사람은 노인들만이 아니다. 기업 투자의 둔화로 고용 창출이 안 되는 것은 물론 소비 심리를 위축시켜 경기 회복을 둔화시키는 등 실물 경제로의 파급 효과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주가가 미래의 경기를 재는 가장 정확한 바로미터로 꼽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증시의 지속적인 침체는 정치판도도 바꿔 놓는다. 역대 미 대통령 치고 증시가 죽을 쓰고 있을 때 재임했다 빛 본 사람이 없다. 1929년 주가 폭락 직전 대통령이 됐다 지금까지 최악의 정치인으로 지탄받고 있는 후버, 66~68년 증시 침체 때 대통령을 지낸 존슨, 스택플레이션이 한창이던 74년 사임한 닉슨, 90~91년 불황으로 재선에 실패한 부시 등이 좋은 예다. 대공황 당시 집권 여당이던 공화당은 그 후 20여 년 간 권력을 내놔야 했다.
지금 투자가들의 최대 관심사는 도대체 얼마나 더 주가가 내려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연초 주가 급등과 함께 지면을 장식했던 희망찬 전망은 사라지고 ‘공포’와 ‘위기’, ‘불안’과 ‘좌절’ 등의 단어가 자주 눈에 뜨인다.
지금이 바닥이라는 기사도 간혹 보인다. 그러나 그런 얘기가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아직도 진정한 바닥까지는 갈 길이 멀었음을 시사한다.
‘마지막 낙관론자가 죽을 때까지 불황 장세는 끝나지 않는다’는 격언이 있다. 모든 사람이 희망을 버렸을 때, 다시 말해 팔 사람은 모두 팔았을 때가 진짜 바닥이라는 것이다. 주가가 진짜 바닥에 다다랐을 때는 모든 사람이 투매하기에 바빠 이런 질문을 던질 여유조차 없다.
아직도 미 주가는 몹시 과대 평가돼 있으며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떨어질 여지가 있다. 그러나 주가는 일직선으로 내려가지는 않는다.
지금처럼 오랜 기간 하락한 후에는 일단 반등 한 후 다시 내려가는 게 상례다. 투자가들의 비관도를 재는 과 매도 지수(oversold index)는 테러 이후 최저점에 와 있다. 15일 한 때 다우 지수가 400여 포인트 폭락했다 종장에서 낙폭을 대부분 회복한 것도 증시가 일단 반등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신호다.
지난 2년여의 줄기찬 하락에도 불구, 주가가 과대평가 돼 있다는 것은 2000년의 증시 광풍이 얼마나 사상 유례 없는 일이었는가를 말해준다. 월가의 한숨 소리에 비례해 증시의 반등 폭도 커지겠지만 그 후 보다 더 큰 하락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지금 증시는 심장이 약한 사람이 가까이 할 곳이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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