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 16일 저녁 백악관 회의실. 리처드 마이어스 합참의장이 조지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 콘돌리자 라이스 안보보좌관 등 행정부 수뇌부가 참석한 긴급회의에서 전쟁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성공률 100%를 장담하고 있다.
부시는 마이어스의 게임플랜에 흡족해 한다. 분위기는 전쟁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미국을 침공해서가 아니라 ‘후환을 없애기 위한’ 선제공격이다. 대상은 오랜 눈엣가시인 쿠바도 이라크도 이란도 아니다. 미국의 가공할 화력이 집중될 땅은 대량살상 무기와 관련해 부시로부터 ‘악의 축’으로 지목된 북한이다.
마침 이 때 예기치 않은 전화벨이 울린다. 북한으로부터 부시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김정일이 아니라 파월 국무장관의 전화였다. ‘비둘기파’인 파월은 북한의 대량살상 무기 처리문제와 관련해 부시행정부의 입장을 전하고 평화적 해결방안을 모색하려 방북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정일은 완강했다. 회담이 결렬되고 파월은 부시에게 이를 통보한 것이다. 공격명령만 남았다.
이상은 하나의 가상 시나리오다. 하지만 실제 이와 거의 같은 상황이 벌어졌었다. 1994년 6월 16일 저녁 잔 샬리카쉬빌리 합창의장이 백악관 회의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대 북한공격계획을 브리핑하고 있었다. 당시 북한에는 카터 전 대통령이 가 있었고, 김일성에게서 핵 개발 중단 확약을 얻어냈고 이를 클린턴에 전화로 알려 전운을 걷어냈다. 그러나 섬뜩한 2003년 시나리오는 마무리가 다르다. 파월의 외교노력이 무산되고 미국은 북한 군사기지를 공격한다. 모든 면에서 열세인 북한으로선 별다른 대응옵션이 없다. 궁리 끝에 북한 수뇌부는 오사마 빈 라덴이 사용한 테러에 이끌린다. 북한 정예요원들이 갖은 방법으로 미국에 들어온다. 북한 사투리를 강하게 쓰지만 미국에 있는 한인들도 실향민이 많아 사투리 자체로 의심받을 일은 없다.
이들이 미국의 주요 시설과 요인 암살을 감행한다. 9·11 테러 이후 아랍계만 경계하던 미국인들은 이젠 북한인 테러리스트들을 색출해내자고 야단이다. 북한인을 구별할 줄 모르는 미국인들은 공항에서 아시안에 대한 심사를 철두철미하게 한다. 대학들도 아시안 유학생, 특히 한인유학생에 대해 주의를 기울인다. 캠퍼스에선 멀쩡한 1.5세 2세들도 감시대상이 된다. 부당하다고 목청을 높이면 “싫으면 네 나라로 꺼져라”하고 쏘아 부친다.
아시안 이민자 모두를 삐딱하게 보고 인종범죄를 저지른다. 억울하게 구타당하는 한인들이 부지기수다. 한인주택에 화염병이 날아든다. 북한인과의 차별화 목적으로 ‘사우스 코리안’이란 머리띠를 두르고 길을 나서도, “우리는 월드컵 4강국”이라고 설명해도 “다 같은 코리안”이란 비아냥거림을 듣기 일쑤다. 미국이 북한을 미워하면 이곳에 사는 한인도 도매금으로 넘어가기 쉽다. 나스닥이 떨어지면 대체로 다우지수도 내려가기 마련이다.
뉴욕 테러 이후 미국 내 아랍계는 물론 인도, 아프가니스탄 출신 등 생김새가 비슷한 이유만으로 ‘보복 테러’를 당한 사람이 부지기수다. 가상 시나리오가 현실화하면 우리도 예외일 수 없다. 취업을 원하는 한인 영주권자들은 미국 직장에서 원천 봉쇄된다. 미국의 안보 때문이란다. 명문대를 나온 2세들도 별 수 없다. 직장인들은 승진인사에서 누락되고 구조조정 시 ‘해고 0 순위’가 된다.
한인의 권익신장을 위한 집단 캠페인은 엄두도 못 낸다. 정계 진출을 노리는 동량들도 꿈을 접어야 한다. 미국인들에겐 ‘어글리 코리안’으로 자리잡힌다. 고착화된 나쁜 이미지는 쉽사리 바뀌지 않아 우리의 자손들이 대대로 그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한반도 서해교전으로 북미대화가 무산됐다. 북한의 무모한 군사행동과 한국정부의 부적절한 대응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한국과 미국정계뿐 아니라 한인사회에서도 거세다. 일리가 있다. 하지만 애당초 북미대화를 반대하던 매파의 득세로 이어지는 현 정국에 무조건 맞장구칠 수만은 없다. 북한이 못마땅해도, 북미 현안을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데 동의할 수는 없지 않은가. 가상 시나리오는 그저 가상으로 남아야 한다. 그래야 한인사회가 편안하고 우리 후손들도 기죽지 않고 당당히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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