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휴지의 차이는 무엇일까. 믿음이다. 돈이 돈으로서 기능을 발휘하려면 모든 사람이 그걸 돈으로 인정해야 한다. 신뢰를 상실한 지폐는 휴지만도 못하다. 백지는 메모지로라도 쓸 수 있지만 앞뒤면 모두 빽빽이 잉크가 칠해진 지폐는 불쏘시개로 밖에는 사용하기 어렵다. 동전마다 ‘우리는 신을 믿는다’고 새겨 놓고 연방준비은행 건물을 그리스 신전 양식으로 지은 것 모두 화폐 제도에 대한 신뢰를 북돋기 위한 수단의 하나다.
역사책에는 믿음이 사라진 화폐의 말로를 보여주는 사례들이 널려 있다. 세계에서 처음 지폐를 발행한 나라는 원나라다. 1273년 쿠빌라이 칸은 뽕나무에 자신과 재무장관의 인을 찍은 화폐를 발행했다. 지폐의 등장은 물자의 교환을 원활히 해 사업을 번성케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원나라 말기에 접어들면서 사치와 낭비로 재정이 궁핍해지자 조정에서는 화폐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원화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는 것과 비례해 가치는 폭락을 거듭했으며 원나라가 망하는 계기가 됐다.
똑같은 일이 미 독립전쟁 때 일어났다.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대영제국과 6년에 걸친 전쟁을 벌이던 연방 정부는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컨티넨털’로 불리던 지폐를 마구 찍었다. 그 결과 1달러 짜리 지폐의 실질 가치는 나중에 2센트로 떨어졌다. 지금도 미국 속담에 "컨티넨틀만도 못하다"(not worth a Continental)이라는 말이 남아 있다.
그러나 화폐의 가치가 얼마나 떨어질 수 있는가를 제대로 보여준 것은 독일이다. 1918년 제1차 대전에서 진 독일 정부는 막대한 배상금과 전쟁 부채를 갚기 위해 마르크화를 무더기로 발행했다. 급기야 1923년에 가서는 5년 전 1 마르크 하던 물건을 사기 위해 7조 2,600만 마르크를 수레에 싣고 다녀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로 인한 극도의 사회 혼란과 경제 불안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과 나치의 등장을 초래했다.
70년대와 80년대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같은 일이 되풀이됐다. 당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서 살던 한인들은 돈을 버는 대로 은행에 달려가 달러로 바꾸는 것이 하루의 가장 큰 일과였다.
현대는 신용사회라고 불린다. 크레딧 카드 한 장이면 돈 한 푼 안내고 수백 수천 달러 짜리 물건을 살 수 있다. 담보도 필요 없다. 넘겨주는 상인과 고객 사이, 고객과 카드 회사 사이, 그리고 카드 회사와 상인 사이에 서로 돈을 갚을 것이라는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은행과 상인, 고용주와 피고용인 관계도 마찬가지다.
한 때 전 세계의 모범으로 불리던 미국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다. 단지 불황과 하이텍 버블이 터졌기 때문만이 아니다. 굴지의 제약체인인 라이트 에이드를 비롯, 첨단 산업의 총아로 불리던 월드컴, 복사기의 대명사 제록스 등이 줄줄이 장부를 조작해 수십 억 달러씩 허위 보고를 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들을 지켜보는 투자가들의 심정은 부엌 바닥을 기어가는 바퀴벌레를 본 주부와 비슷하다. 나쁜 벌레가 한 마리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심이 이들을 불안케 한다.
장사를 해 돈을 얼마를 벌었느냐는 사실은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기업 정보다.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자체 감사와 외부 감사, 감독기관이 있고 월가의 증권 분석가들은 매일 그 진위를 나름대로 조사한다. 그럼에도 이런 사기극이 수년에 걸쳐 조직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은 미 경제 제도의 건전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주요 주가 지수가 9·11 테러 직후 수준 이하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투자가들의 실망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다. 미국 기업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때 피해를 보는 것은 투자가만이 아니다. 이들에 생계를 맡기고 있는 직원과 고객, 나아가서는 국민 전체와 세계 경제가 흔들린다.
모든 인간관계는 믿음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신뢰가 깨질 때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존립할 수 없다. 미국 경제 체제에 대한 투자가들의 신뢰가 회복되지 않는 한 경기 회복도 없다. 정부 당국은 이같은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 감사 요건을 엄격히 하고 기업 총수가 감사 결과의 진실성을 개인적으로 보증하는 등 개혁 조치를 추진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개인이나 집단이나 한번 깨진 믿음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연초 수많은 전문가들이 점치던 경기 회복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다.
<민경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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