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전사들과 로마군단이 격돌하는 순간 다른 모든 것은 존재의 의미를 상실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그건 아무 상관없다. 오직 한 골만이 의미가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안정환의 머리를 스친 공이 이탈리아의 골네트를 갈랐다. 순간 모두 얼싸안았고 대한민국은 하나가 됐다.
안정환이, 태극전사들이, 히딩크가 국민의 우상으로 우뚝 선 순간 ‘대∼한민국’은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한국인의 이데올로기가 됐다. 그리고 스페인전. 대한민국은 또 한차례 축구의 주술(呪術)에 빠져들었다. 마지막 키커 홍명보의 킥이 성공하는 순간 환희의 함성이 울려 퍼지고 거대한 붉은 해일이 대한민국을 덮쳤다.
700여만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거대한 용암의 분출이다. ‘대∼한민국’을 외치며 광화문 네거리를, 시청 앞 광장을 붉게 물들인 신세대. 한국의 젊은이들은 모두 거리 응원에 나선 건지 모른다. 엇박자로 이어지는 붉은 함성을 미친 듯이 토해내는 700여만의 젊은이들. 이건 아무래도 정상은 아니다. 집단적 광기에 가깝다. 그들은 왜 열광하는 걸까.
결국은 한바탕 꿈이었는지 모른다. 한 여름밤의 몽상이 현실로 나타난 건지도 모른다. 그 주술이 결국은 풀렸다. 그러나 너무 감미로운 꿈이었다. ‘4강 신화를 마침내 이루었다’는 감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데 한 국내 정치부 기자는 이렇게 일갈했다.
"우리 축구팀이 월드컵 4강 진출의 신화를 창조하자 정치권이 호들갑이다. 각 당은 … 나름대로 ‘포스트 월드컵’ 대책 마련에 부산을 떨고 있다…."
3김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회창이, 노무현의 얼굴이 오버랩 된다. 거기다가 장관이, 국회의원이, 서슬 퍼런 검찰이, 국정원이 덧입혀진다. 이 모든 게 한국의 정치권이다. 그 모두에 대한 질타다.
’호들갑’이라는 표현을 썼다. ‘부산을 떤다’고 했다. 함량미달 인간들의 경박한 작태를 꾸짖는 말이다. 정치권 전체를 인격 상실증 인간집단인 양 몰아치고 있다. 젊은 기자의 혈기일까. ‘신성한 축구’를 정치에 이용하려는데 대한 분노 같은 게 묻어 있다.
하루의 시차가 있었던가. 사이버 공간에는 더 끔찍한 말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인용하기조차 민망한 원색적 표현들이다. 신랄한 조소다. 아니 증오로 가득 찬 신음이다.
"전 현직 쓰레기들이 다 모였네요. 지금까지 정치 쓰레기들이 모여 한 일이 뭐더라. 어쩐지 쓰레기 냄새로 우리 선수들이 못뛰었나 보다." "이 나라 말아먹은… 다모여 추점덜때 다 알아봤다…" "왜졌는지 알아따… 대한 3적이 다모였구나…."
한국과 독일과의 4강전에 전 현직 대통령들이(전직은 전두환·김영삼 대통령) 나란히 앉아 관전했다. 결과는 한국의 패배다. 사이버 공간에는 네티즌 반응이 넘쳐났다. 그들은 쓰레기로 취급됐다. 마치 그들 때문에 ‘신성한 태극전사’가 부정을 탔다는 식의 원망이다.
온 나라가 축구에 열광한다. 감동의 연속이다. 열광과 환희의 축제는 그렇지만 마냥 이어질 수 없다. 어느 날 홀연히 현실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러자 환희의 메아리는 잔치의 끝마무리에서 야유와 경멸로, 독설로, 증오의 신음으로 변한다.
정치권을 향해 내뱉은 젊은 기자의 질타. 전·현직 국가원수에 대한 저주에 가까운 네티즌 반응. 이는 축제가 끝나면서 부지불식간에 드러난 정치권에 대한 집단적 감정표출의 한 단면이다.
환희의 함성은 그렇다면 대리만족에 다름이 아니다. 무기력한 일상, 답답한 정치 현실로부터 일탈을 시도한 축제의 감성적 발로일 뿐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단순히 축제로만 보기에는 너무 비정상적이다. ‘붉은 해일’로 표현된 거대한 집단행동은 도전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700여만이나 되는 젊은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왜.
"그것은 공동체가 없이 나 혼자 즐기는 재미는 즐거움이 아니라는, 젊은이들이 보여준 열린 가슴의 어깨 동무였다. 함께 꿈꾸어 보자. 하나됨과 나눔을. 그것은 무엇보다도 남북의, 동서의, 계층의 갈등을 허무는 하나됨 일 것이다…." 작가 한수산씨의 지적이다.
거대한 용암처럼 분출된 붉은 함성은 ‘가자!’(GO!)는 외침이다. 폐쇄적인 떼거리주의나 판치는 정치. 태극기조차 기피하는 오도된 풍조. 콤플렉스 투성이의 주변의식. 이런 것들은 모두 ‘가라’는 외침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이제 이 신세대의 당당한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수백만 인파가 길거리 응원에 나선 것은 대중이 정쟁에 환멸을 느껴온 데도 영향이 있다. 우레 같은 대중의 응원소리는 언제든지 분노의 함성으로 바뀔 수 있다…." 한 여름밤의 꿈에서 깨어난 후 한국의 정치권이 일차 보인 반응이다.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신세대. 그 움직임을 주목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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