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정해놓고 오면 좋을 텐데. 예를 들어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시간이 감에 따라 나는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기다림의 가슴 설레는 행복감을 가르쳐 주는 대목이다(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아침 출근길에 왠지 신이 나서 생각해보면 그날 밤 축구경기가 있고, 새벽에 경기가 있는 날이면 미련 없이 일찌감치 귀가해 기분 좋은 잠에 빠져들며 우리는 들뜬 6월을 보내고 있다.“월드컵 경기시간이 미리 정해지지 않았다면 기다림의 달콤함까지는 맛보지 못했을 거야”라고 여우는 말할 것이다.
2002년 6월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던 분위기로 우리의 삶을 압도하고 있다. ‘월드컵’이라는 거대한 흐름이 우리의 시간 속으로 밀려들면서 일상적 개개인의 삶들은 모두 뒷전으로, 일개 지류로 밀려난 느낌이다.
촌티를 완전히 벗고 세련된 동작으로, 우리의 예상과 기대를 무색하게 앞지르며 선전하는 한국 선수들의 강한 투지와 팀웍, 그들을 기어이 승리로 몰고가는 히딩크 감독의 탁월한 지략, 그리고 하해라고 밖에는 표현할수 없는 끝없는 붉은 응원인파… 그 모두가 한데 어울려 이루는 강렬하고 눈부신 이벤트 앞에서,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때론 웃고 때론 얼굴 붉히며 살던 우리의 그저 그런 일상은 빛을 잃고 말았다. 대화내용도, 하루의 일과도 축구가 지배하는 이상한 삶인데, 우리는 그걸 마냥 즐거워하고 있다.
우리가 월드컵에 이렇게 빠져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금쪽같은 새벽잠까지 포기하며 경기를 기다리는 그 기다림의 내용은 무엇일까.
모범답안은 이렇다. 한국이 역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16강, 8강…의 관문을 통과하면서 얻는 코리안으로서의 자부심, 붉은 응원대열에 동참하며 느끼는 민족적 일체감과 애국심, 기존질서가 전혀 인정되지 않는 스포츠의 예측불허성이 주는 팽팽한 재미 등이 경기장으로, 광장으로, 그리고 TV 앞으로 사람들을 빨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뿐일까. 모범답안을 한꺼풀 벗겨내고 나면 보다 근원적인 답이 그 밑에 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재미가 결여된 우리 일상의 무료함과 상관이 있다.
목청껏 소리지르고, 손에 땀을 쥐며 긴장하고, 손뼉을 치며 기뻐하고, 통쾌함에 저도 모르게 환호하는, 감정의 극대치를 경험해보는 것이 도대체 얼마 만인가. 경기 관전중 우리 몸을 타고 자연스럽게 터져나오는 일차원적 반응들, 그 신선한 체험이 우리를 한밤중에, 새벽에 TV화면 앞에 앉게 하는 건 아닐까. 시속 20-30마일로 로컬도로만 달리던 차가 모처럼 프리웨이를 마음껏 질주하는 듯한 가슴 후련한 카타르시스가 거기에 있다.
중고차를 살 때, 10만마일 달린 5년된 차와 3만마일 달린 10년된 차가 있다면 어느 차를 선택해야 할까. 자동차 전문가들은 5년된 차를 권한다. 햇수에 비해 주행거리가 짧은, 다시 말해 로컬도로만 다닌 차는 무겁다는 것이다. 저속 주행중에는 개솔린이 불완전 연소돼 엔진 안에 탄소 찌꺼기가 쌓이기 때문이다. 반면 하루 1-2시간씩 시속 60-70마일로 프리웨이를 달리는 차는 개솔린이 완전연소돼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한다.
불완전 연소는 자동차에 출력 감소, 연료 소모량 증가, 매연 증가, 소음 증가등을 초래하는데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뭔가에 깊이 몰입하는 일 없이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무료한 일상에 갇혀 살면 일의 능률이 떨어지고, 의욕이 없고, 늘 불평이고, 그래서 주위 사람들까지 우울하게 만든다. 개솔린만 잔뜩 먹고 시커먼 매연을 뿜으며 툴툴거리는 시끄러운 차가 되고 만다.
월드컵은 어떤 대상에 열정적으로 몰입할 때 얼마나 삶이 신바람 나고 내재된 에너지가 얼마나 엄청난 힘으로 분출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평소 로컬만 다니던 차는 가끔 2-3시간씩 프리웨이를 달려주면 엔진 속의 찌꺼기가 다 타버려 차가 가벼워진다고 한다. 월드컵은 이제 곧 끝나겠지만 각자 몰입의 대상, 즐거움의 대상을 만든다면, 20만마일을 달려도 쌩쌩한 차동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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