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6월은 상당히 길게 느껴진다. 한국 축구가 월드컵 본선에서 첫 승을 거둔다. 이어 16강에 진출한다. 그리고 8강에…. 너무 벅찬 감정 때문일까.
환호로 출렁이는 거대한 붉은 파도. 환희와 감동의 물결이다. 얼굴에 태극무늬를 새긴 젊은이들. 붉은 티셔츠에, 붉은 머플러, 미친 듯이 붉은 색을 흔들어대며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신세대. 이건 분명히 한국의 현실이다. 그런데 어쩐지 초현실 같이 비쳐진다.
환희와 감동의 물결. 그 너머로 6월의 다른 얼굴이 오버랩 된다. 분노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들. 최루탄 냄새가 확 풍긴다. 독재의 냄새다. 중무장한 전경들. 맨손으로 맞서는 대학생들. 결국 넥타이를 맨 아저씨들도 나선다. 거대한 항쟁이다. 분노가 6월의 얼굴이었다.
6.25가 있었다. 피비린내가 난다. 핏발선 눈동자. 증오의 얼굴이다. 공포의 얼굴이다. 죽음의 얼굴이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나라가 두 동강났다. 민족이 서로의 가슴에 총칼을 디밀었다. 온통 피바다다. 그 붉은 피. 뜰 앞에 핀 백일홍만 보아도 섬뜩했다. 피의 붉은 색이 주는 공포다.
온통 붉은 색 천지다. 붉은 전사(戰士)들이 한 골을 넣을 때마다 관중석은 붉은 파도를 이룬다. 온 나라가 붉은 색으로 물든다. 함성도 붉은 색이다. 감동도 붉은 색이다.
붉은 전사들이 골 세리머니를 벌인다. 동계 올림픽에서 안톤 오노가 할리웃 액션을 벌인데 대한 항의 세리머니다. 온 한국이 열광한다. 뉴욕타임스는 그 시간 특집기사를 다룬다. 북한의 감옥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아살육 사태다. ABC 방송의 나이트 라인도 북한 특집이다. 탈북자 실태다.
단지 먹을 것을 구하러 국경을 넘었던 여인이다. 그 여인이 애를 가졌다. 중국 공안에 붙잡혀 송환된다. 고문을 당한다. 강제 주사를 맞는다. 애를 떼기 위해서다. 그런데도 생명은 태어난다. 그 생명은 그러나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바로 죽음을 당한다.
대 여섯 살 난 아이로 보인다. 아무 표정이 없다. 배고픔이라는 본능만이 이 아이의 모든 것 같다. 어머니가, 형이, 동생이 굶어죽는 과정을 보았노라고 이 아이는 말한다. 아무 표정도 없이. 나이트 라인에 비쳐진 탈북 어린이의 모습이다.
한국이 마침내 16강에 진출한다. 흥분, 흥분이다. 박지성의 한 골이 터지는 순간 사람들은 얼싸안고 눈물은 흘린다. 48년만의 쾌거요, 단군 이래의 경사다. 온 나라가 감격으로 충만해 있다. 중국의 수도 북경. 탈북자들의 목숨을 건 질주는 계속된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국대사관 영사부로 뛰어든다. 중국 공안이 영사부 안까지 달려든다.
저지하는 한국 외교관에 폭행을 가한다. 한국의 주권이 침해된다. 아버지는 아들이 보는 앞에서 끌려간다.
여전히 열광의 도가니다. 승리의 환희에 사로잡혀 있다. 이제는 8강이 눈앞에 있다. 온통 월드컵 열기다. 모두가 흥분과 감동에 싸여 있다.
"6.15 공동선언에서 한치도 물러설 자리가 없다는 결연한 의지 밑에 천리혜안의 예지와 영활무쌍한 지략으로 통일위업을 이끌어오신 위대한 김정일 동지…" 6.15 2주를 맞아 북한 노동신문이 게재한 사설이다. 북한은 아리랑 축전이 한창이다. 북한식 표현대로라면 ‘그 형식과 규모에 있어 아직 있어본 적이 없으며 비길 데가 없이 아름답고 고상한 문화예술의 새로운 영역을 인류 앞에 펼치고 있는 행사’가 아리랑 축전이다.
김일성 주석 90회 생일을 맞아 펼쳐진 이 축전을 100여만이 관람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원된 관람객이다. 동원된 관람객을 대상으로 집단체조 등 기계적인 공연이 실시되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8강에 올라선다. 온통 환희의 물결이다. 수백만이 이미 거리에 쏟아져 나와 있었다. 역전의 골이 터지는 순간 수백만, 아니 수천만이 하나가 된다. 붉은 함성은 거대한 해일이 돼 온 누리를 뒤덮는다.
붉은 함성으로 뒤덮인 2002년 6월의 한국, 아니 대한민국은 어떻게 표현되어져야 할까. 월드컵의 광기(狂氣)에 사로잡힌 나날로 기록될까. 아니면.
수천만을 하나로 묶은 순간의 함성과 일체감은 그러나 기획된 게 아니다.
자연스레 분출된 것이다. 국민의 자발적 참여다. 그것은 하나의 창발적(創發的) 현상이다. 글로벌한 문화체험의 한국적 표현이라고 할까. 월드컵이라는 세계인의 축제의 호스트로서 한국의 신세대가 보여준 새로운 세계화의 모습일 수도 있다.
6월은 그러나 여전히 길게 느껴진다. 세계를 향해 당당한 몸짓을 하는 한국의 신세대, 그 너머로 또 다른 한국인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서다. 생존을 향해 몸부림치는 탈북자. 피곤한 미소, 박제된 미소로 해외관람객을 맞고 있는 북한주민. 거기다가 오만한 중국 공안의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6월은 더 더욱 길게 느껴진다. 증오의 6월, 분노의 6월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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