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심에 대해 논하라’-. 이런 주제의 논술시험이라도 보게 됐다고 하자. 대답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생각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한인의 입장에서는 더 어렵다. 애국심은 정체성(identity) 확립이 그 출발점이다. 말하자면 확실한 소속감이 우선된다. 이 부문이 그런데 몹시 혼란스러워서다.
미주 한인, 다른 말로 하면 코리안-아메리칸은 이 땅을 제2의 조국으로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념적으로, 머리로는 미국인이다. 그러나 감성적으로, 마음으로는 여전히 한국인이다. 그래서 혼란스럽다는 말이다.
‘미국인이란 누구인가’-. 9.11 테러가 발생하자 새삼스레 제기됐던 질문이다.
미국은 이민으로 형성된 나라다. 핏줄의식에 따른 미국인의 정체성 논의는 통하지가 않는다. 그래서 ‘누가 미국인인가’에 대한 정의가 쉽지 않다.
‘미국의 역사란 아웃사이더가 인사이더가 되기 위해 추구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끊임없는 투쟁이다’-. 이민의 나라라는 특성과 함께 내려진 미국 역사에 대한 정의다. 미국인의 정체성은 시대의 변천, 이민의 역사와 함께 계속 변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특수성과 관련해 미국민, 미국을 이야기 할 때 흔히 원용되어 온 용어가 멜팅팟(melting pot)이었다. 이 멜팅팟이란 말은 그런데 ‘강요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
한 그룹이 이민을 왔다. 이 그룹은 새로운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모국어를 사용하지 않아야 했다. 미국적 관습에 순응하면서 전통문화까지 포기했다. 이게 멜팅팟 개념이다.
70년대부터 멜팅팟의 개념은 희석됐다. 대신 등장한 게 문화적 다원주의(multiculturalism)다. ‘샐러드 보울’로 비교되는 이 다문화 사회의 개념은 ‘참여의 의미’를 강하게 내뿜고 있다.
문화적 다원주의는 60년대 민권운동의 열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본에 있어서는 관용(tolerance)을 기반으로 한 미국 정신에서 비롯됐다고 보아야 한다. 이민그룹 고유의 전통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다양성을 추구하는 게 다원적 문화주의다.
‘미국인이 된다는 것은 부와 안정의 추구에만 동참한다는 것일 뿐이다’-. 문화적 다원주의가 만발한 20세기 말 일부 학자들이 내린 정의다. 극단적 정의다. 그러나 수백개 이민그룹으로 형성된 미국사회의 단면을 예리하게 해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다양성은 미국의 특색이다. 또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개방성이 미국의 파워다. 이같은 개방성 때문에 미국이 오늘날 서구문명의 중심이 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한 국가의 정체성을 혈통주의적 표준에 두느냐, 문화적 표준에 두느냐의 이야기다. 코리안-아메리칸은 미국적 표준(American Standard)에 가치를 부여하는 한국인이다. 그러므로 이 땅을 선택했고 결국은 미국 시민권자가 된 것이다. 미국인이란 따라서 혈통에 관계없이 미국적 가치를 존중하고 이 땅에 뿌리를 내리는 사람이라는 정의가 가능하다.
문화적 표준은 이제 세계적 흐름이다. “세계인들은 두 개의 문명에 속한다. 특정 국가의 시민인 동시에 보편적이고 동질적인 세계문명의 주민이다. 북미, 서구, 한국, 일본 등 NATO(북대서양조약기구)-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시스템에 편입된 국가의 시민은 바로 한 국가의 시민이자 ‘서방’이라는 보편적 세계문명의 주민이다.” 문화는 핏줄보다 강하다는 이야기다.
“전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한국의) 축구열기 속에 나타난 강한 집단주의와 민족주의인 것 같다…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방어적이라기보다는 개방적이고 열린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본국지에 실린 칼럼 내용으로 월드컵의 의미를 열린 민족주의로 가는 시발점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번 월드컵에서는 이미 여러 형태의 ‘열린 민족주의’가 선보였다. 스웨덴과 16강을 다툰 잉글랜드팀 감독이 스웨덴 사람이다. 프랑스를 격침한 세네갈 감독은 프랑스인이다. 프랑스 언론이, 스웨덴 언론이 그들을 매국노로 매도했다는 기사를 보지 못했다.
월드컵은 그러면 미주 한인에게는 무슨 의미를 주고 있을까. 그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전에 한번 이런 가정을 해보자. “2006년 월드컵이다. 한국과 미국이 마침내 4강전에서 맞붙게 됐다. 그런데 내 아들이 미국의 대표선수로 출전하게 됐다. 어느 편을 응원할 것인가.”
미주 한인은 코리안-아메리칸이다. 세계문명의 주민이다. 월드컵은 전 세계주민의 축제다. 월드컵을 한국인의 집단적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세리머니로 승화시킬 때 열린 민족주의 시대가 열린다. 코리안-아메리칸에게 월드컵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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