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를 가리는 게임에서는 으레 승자가 영예를 독차지한다. 그래서 기도를 드리거나 제사를 올리면서까지 승리를 기원한다. 하지만 승자가 아니면서 승자의 승리보다 더 값진 결과를 얻는 경우도 있다. 한국이 미국과의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힘겹게 따낸 무승부가 바로 그것이다.
한국이 미국을 눌렀다면 16강 진입 문턱 앞에 도달했을 텐데 무승부가 됐으니 이제 최상의 시나리오는 물 건너간 셈이다. 폴란드를 4대0으로 대파해 슬슬 진가를 보이고 있는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부담을 안고 전·후반 90분을 뛰어야 하는 상황이고 16강 진출 가능성이 줄어들었으니 무승부 예찬론이 얼토당토않은 궤변으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승패 없이 끝난 한·미전은 여러모로 ‘부가가치’를 지닌다. 우선 아직도 낙제점 수준의 한국정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미국을 이겼더라면 유권자들은 다소 느긋해졌을 것이고 6·13 지방선거에도 어느 정도 관심을 보였을 게다. 그랬다면 종전대로 후보들은 구태의연한 정치 행태에 대한 일말의 반성도 없이 제 잘난 맛에 되는 소리, 되지 않는 소리를 여과 없이 쏟아냈을 것이다.
다행히 이번 무승부는 포르투갈과의 경기에 무게를 한껏 실으면서 지방선거에 대한 유권자들의 무관심을 지속시키는 효과를 내게 됐다. 월드컵에 대한 당연한 쏠림이기도 하지만 신물나는 정치판에 대한 ‘옐로 카드’이기도 하다. 당원이나 지지자들만 ‘우정 출연’한 유세장 연단 위에서 마이크를 잡은 후보들을 정신차리게 하는 각성제가 될 수 있다.
후보들의 입씨름에 맞장구치며 사회가 이리 저리 갈리고 찢기는 짜증나는 선거 철에 한국인을 모처럼 하나 되게 한 것은 월드컵이다. 굳이 ‘붉은 악마’가 아니더라도 경기장이나 광장에서, TV 앞에서 선수들을 응원할 때만큼은 호남이든 영남이든, 한나라 지지자든 민주 지지자든, 부익부를 만끽하는 부유층이든 빈익빈에 침울한 빈곤층이든 모두 한마음이다.
대화에 어눌하고 화합에 서툰 한국인에게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는 계기다. 무승부는 또 16강 진출이 험난하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경제 선진국 진입을 위해 뛰는 한국인들에게 선진한국 건설이 호락호락한 일이 아님을 우회적으로 일러준 것이다.
정치가 어떻고 사회가 어떻고 하는 딱딱한 거시적 담론뿐 아니다. 한·미전 무승부는 선수, 감독에게도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골을 넣은 선수는 ‘충신’이 되고 평소 발군이라도 자살골을 먹거나 완벽한 득점 기회를 살리지 못한 선수는 ‘역적’이 되는 게 냉혹한 그라운드의 현실이다.
페널티 킥을 실축한 이을용은 후반에 심기일전해 미국 문전에 들어가 있는 안정환의 머리를 향해 센터링했고 이 골이 미국의 골네트를 흔들었다. 동점으로 갈 수 있는 천금의 페널티 킥을 무위로 끝냈지만 절묘한 어시스트로 ‘속죄’했다. 수렁에서 허우적대던 한국을 기사회생시킨 것이다.
만일 한국이 한 두 골을 추가해 보란 듯 역전승 했더라면 동점골은 승리로 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기억될 뿐이었다. 동점골의 의미가 희석되는 만큼 이을용의 ‘나쁜 기억’은 오래 남았을 것이다. 오히려 무승부로 끝났기 때문에 동점골이 더 주목받게 되고 골이 가능케 한 어시스트가 실수를 상쇄한 것이다. 무승부를 이끌어내도록 골을 연결시켜준 장본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히딩크 감독도 그렇다. 영웅대접을 받고 있지만 세계 축구의 벽은 단단하고 높다. 너무 일찍, 그것도 아주 높이 헹가래를 당하면 떨어질 땐 충격도 대단하게 마련이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이 첩첩이다. ‘히딩크 주가’도 서서히 올라가는 게 낫다. 이번 무승부는 흥분을 가라앉히라는 충고다. 그리고 남은 경기에서 선수들이 기량을 100% 발휘할 수 있는 계책을 확보하라는 주문이다.
매사에 승리와 승자는 선망의 대상이다. 승리는 최선이고 나머지는 들러리라는 게 ‘불문율’로 통한다. 무승부는 ‘차선’으로 폄하되기 일쑤다. 하지만 ‘최선’이 주지 못한 것을 ‘차선’이 선사할 수 있음은 삶의 또 다른 넉넉함이다. 1대1로 끝난 한·미전이 던져준 선물은 그래서 곱씹어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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