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하루는 목하 월드컵의 팡파르로 열리고 구장의 함성과 함께 저문다. 14년 전, 세계의 축전 88올림픽 이후 또 한차례 맞이한 우리 민족과 세계의 축제 한마당이니 누군들 가슴 설레지 않겠는가. 태극 전사들의 씩씩한 투지와 멋진 플레이가 골문을 가를 때마다 4,500만이 내지른 함성이 방방곡곡에 넘친다. “나라의 운이 요즘만 같아라”하는 바람은 괜한 이야기가 아니다.
월드컵의 열풍이 6월 한달, 이 땅엔 흥분과 환희와 탄성이 충만할 것이다. 16강에라도 오른다면 그 감격은 또 어떨까. 아니 상위권 티켓을 놓친다한들 성공적인 대회를 마칠 수만 있다면 앙앙불락할 것도 없다. ‘월드컵은 경제’라고 하지 않던가. 이 세계 축전을 통해 우리 이미지를 한껏 높이고 막대한 부가가치를 얻는다면 우리의 목표는 달성되는 셈이다.
박수도 감격도 없는 선거판
젊음과 열광이 넘쳐나는 그라운드의 대접전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또 다른 한편에선 관객들을 결코 감격시키지 못하는 진흙탕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바로 ‘선거와 정치 현장’이다. 6월13일의 지방 자치선거와 올 12월19일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의 전초전이, 방방곡곡에서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다. 하지만 이 경기장엔 박수도 함성도 없다.
오직 상대편 태클과 야료와 헐뜯기만 난무할 뿐이다.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멋진 말이 무색하게 내 손으로 뽑은 우리 마을 대표가 검은 돈을 삼키고는 줄줄이 쇠고랑을 차고 감옥으로 간, 저 구역질나는 부패행렬을 목도한 국민들에게 “나는 정말 깨끗한 사람이니 뽑아 주시오”하고 허리를 굽힌들 무슨 감흥을 주겠는가.
어디 풀뿌리 현장뿐이랴. 지엄한 권부로부터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처절한 지경에 와있지 않은가. 한데 권력 주변의 머리 좋은 아저씨들은 순후한 민초들이 정치를 향해 침 뱉고 월드컵 구장으로 달려가자 “옳지 잘 됐다”하면서 자기네 비리 덮느라 요모조모 잔머리를 굴리고 있다.
“우리 역사에 한번 오기도 힘든 월드컵을 하는 마당에 정치 싸움질을 해서야 쓰겠느냐”는 것이다. 소위 집권당이라는 민주당에선 아주 까놓고 속셈을 내보였다. “월드컵이라는 국가대사를 놓고 대통령 주변의 비리문제를 시시콜콜 시비 거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가 아닌가? 16강의 국민적 염원을 달성해야할 마당에 대통령 아들들을 잡아넣으라는 게 국익을 위해 바람직한 일인가?”-
이게 무슨 얄팍한 언사인가. 백성을 바보로 아나? 말이야 바로 하자면 월드컵과 대통령 아들들 비리 척결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대통령 아들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 잡혀간다면 나라 체면이 뭐가 되겠냐고? 아주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다. 하지만 그 말 뒤에는 “이참에 잘됐다. 여론의 눈초리를 다른데 돌리고 시간을 벌면서 증거도 없애고 관련자들 간에 말도 맞추고…”, 이런 얄팍한 생각들이겠지만 세상이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다.
월드컵과 부패척결은 별개
만약 DJ의 둘째 아들도 비리혐의가 드러나 쇠고랑을 찬다면(그럴 공산이 크지만) 세계에 꼭 창피스러울 뿐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우리를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다. “코리아가 부패공화국이라더니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인데… 가만 있자, 최고 권력자의 아들들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구속됐다? 그렇다면 코리아는 법 정신이 살아 있고 정의가 살아 숨쉬는 나라가 아닌가!”하는 경이의 소리도 들릴 것이다.
이치도 그렇다. 상처투성이 얼굴에 분칠을 하고 쓰레기더미(부패)를 슬쩍 포장해 눈가림을 한다 해서 우리 얼굴이 미인이 되고 나라가 정토(淨土)가 되는 것은 아니다. 냄새 풍기는 쓰레기는 잔치를 위해서도 얼른 치워야하고 더렵혀진 땅은 분갈이를 해 정토로 만들어야하는 게 당연한 순서다.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권력형 부정부패와 온갖 비리를 척결하는 문제야말로 국가의 어느 일보다 시급하고 중차대하다. 지도층과 그 주변이 썩어 나라 곳곳이 고름으로 가득 찬 환부를 그냥 놔둔 채 월드컵 16강에 오른들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는가.
이런 점에서 월드컵을 이유로 권력형 부정부패의 진상을 밝히는 모든 노력을 유보하거나 중단하는 것은 절대로 옳지 않다. 우리가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된 국민이라면 월드컵은 그것대로, 부패문제 척결은 또 그 문제대로 풀어나가야 한다.
우리의 ‘태극 전사들’이 전력을 다해 16강, 아니 8강에 우뚝 서는 그런 경사 속에서 우리의 밝은 미래를 건설하기 위한 또 다른 노력, 즉 부패 추방의 범국민적 합창도 함께 울려 퍼진다면 우리는 모든 면에서 세계 8강의 위상을 유감 없이 떨칠 수 있는 것이다.
막말로 축구는 16강인데 나라 청렴도는 세계 ‘마흔 아홉 번째’(국가투명도 조사)라면 뭐 자랑하고 나설 주제가 되랴. 검찰이 진정 국민들로부터 박수를 받으려면 ‘태극 전사들’이 초원의 구장을 누비듯이, 사법(司法)의 들판을 질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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