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symbol) 이외에는 다른 가치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을 그토록 갈망하고 얻고자 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 하야카와가 한 말로 기억된다.
사람은 어찌 보면 상징이라는 허상을 쫓아다니는 존재인지 모른다. 끊임없이 개발되는 신상품. 시장경제의 메커니즘도 따지고 보면 상징조작에 쫓기는 인간심리의 허구를 노린 것일 수 있다.
스포츠도 마찬가지 같다. 내가 좋아하는 팀이 졌다. 그렇다고 인생이 달라지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엄청난 허탈감에 빠진다.
전 세계가 월드컵에 열광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오사마 빈 라덴도 살아있으면 어딘가에서 월드컵 경기를 TV중계를 통해 관람할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그만큼 월드컵 축구는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다.
왜 사람들은 축구에 그토록 열광하는 걸까.
‘사커 맘’(Soccer Mom)이란 말은 비교적 최신의 유행어다. 신도금시대, 그러니까 풍요의 90년대에 탄생한 말이다. 미국에서 축구는 이 사커 맘들의 이미지와 고착돼 있다.
사커 맘은 교외지역 거주하는 미주류 사회의 ‘억척 엄마’들이다. 미국형 치맛바람의 장본인들이다. 이들은 풍요의 상징인 대형 SUV(Sports Utility Vehicle)를 몰고 다니기 십상이다.
사커 맘들은 미국인에게는 생소한 축구를 아이들에게 시킨다. 왜 야구가 아닌 축구인가. 일종의 ‘차별화’ 의식의 발로 같다. 축구는 난폭하지 않다. 남녀 구별 없이 즐길 수 있다. 말하자면 남성위주에, 폭력에 물들어 있는 미국적 생활 양태에서 일탈해 있다는 인식에서라는 진단이다.
사커 맘들이 축구를 좋아하는 진정한 이유는 사실 다른데 있을 수 있다. 오늘날 미국의 스포츠는 블랙이 지배한다. 축구는 아니다. 이 점에서 축구를 좋아하는지 모른다.
축구는 미국에서 여성화됐다. 사커 맘이 연상되고 중상류 계층의 가치관을 부지부식간에 상징하는 게 미국의 축구다. 미국이 세계여자축구대회에서 우승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미국 팀이 월드컵에서 예선통과도 못한다. 어떤 일이 일어날까. 축구는 미국적 파토스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대답도 자명해진다. 별일이 없다는 것이다.
미국을 벗어나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축구는 집단적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군중을 움직인다. 전쟁과 비교될 수 있다. 지극히 남성적이다. 축구는 단순한 게임이 아닌 것이다. 축구는 ‘국가의 혼(魂)’이기도 하다.
독재자들은 대체로 축구를 좋아한다. 한번의 대회로 끝날 위기에 있던 월드컵이 계속 유지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의 공로인지 모른다.
제2회 로마 월드컵 대회가 열린 30년대 초는 전 세계적 대공황 시기였다. 월드컵 개최가 불투명해지자 이탈리아가 적극 나섰다. 무솔리니가 노린 점이 바로 월드컵 특유의 상징성이다. 파시즘의 정당성과 이탈리아의 위대함을 과시하기 위해 월드컵을 적극 활용하고 나섰던 것이다.
독재 권력과 스포츠, 특히 축구는 이후 독재자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식민지시대 ‘저항적 민족주의의 상징’이었던 축구가 남북체제 경쟁의 도구가 됐다.
북한이 월드컵 8강에 진출한 업적도, 또 박정희 시대에 상비군 국가대표 축구팀이 구성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 때문인지 한국 축구에는 민족주의가 진하게 묻어 있다. 그리고 뭔가 한(恨)이 서려 있는 느낌이다.
축구의 세계대전이 이제 시작됐다. 전 세계 192개 국가중 지역예선을 통과한 32개 국가 대표팀이 대회전을 벌인다. 이 축구전쟁은 여러 가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는 아무래도 한국팀의 경기가 단연 넘버 1의 관심사다.
월드컵의 관전 포인트가 그러나 너무 승부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 축구는 문명의 에너지다. 계층과 국가와 이념의 벽을 넘게 하는 게 축구다. 월드컵을 편협한 민족주의의 경연장으로 전락시킬 때 그 대회는 실패한 대회다. 정치라는 게 슬며시 끼여들어서는 더구나 안 된다.
16강 진출은 이제 한국인의 염원이 되다시피 했다. 이겨야 하고, 이겨야 좋다. 그러나 져도 흔들리지 않는 의연한 자세가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축구는 축구일 뿐이다. 축구가 대한민국은 아니다.
한국 축구가 발전했다는 것은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열린 마음으로 관전하고 주인 노릇을 하는 성숙된 자세도 포함된다. 그럴 때 한국 축구의 한이 풀리는 축제의 장이 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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