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망대
▶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 교수 장석정
9.11 참사는 전 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아직도 여러 부문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각 국은 언제 어디서 자국의 안녕과 복지가 외부세력에 의해 침탈 당할지 모른다는 걱정 속에 문단속을 단단히 하게 되었고 의심스러운 외부세력을 견제, 배격하는 정치적 배려를 서두르게 되었다.
각 국에서 이른바 보수 우파들이 득세하고 정책기조와 국민여론이 오른쪽으로 기우는 우경화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고이즈미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강행을 비롯해서 자위대 강화, 전쟁미화, 천황 재인식, 독도 영유권 주장, 조업권 확장 등으로 이어지는 국가주의적 우경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유럽에서는 이슬람과 다른 이민자로부터 프랑스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 마리 르펜이 이끄는 극우파가 최근 급부상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는가 하면 스페인,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덴마크,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지에서도 인종차별과 반 이민정책을 공공연히 들고 나오는 우파들의 약진이 돋보이고 있다.
이렇게 범세계적으로 국가주의적, 문화 민족주의적 경향이 심화되고 우경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은 오늘을 사는 인류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저마다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배타주의로 일관할 때 우리는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서로간의 사랑과 존경과 동정과 이해를 저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간다움을 저버리는, 즉 인간성의 망각 내지는 상실을 의미한다.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는 1949년 그의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당시 엄습하는 냉전의 공포 앞에 떨고 있는 세계를 향하여 무엇보다도 인간성의 상실을 경고했다. 그는 인류가 땀흘리고 번민하는 까닭은 오직 인간의 가슴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만고불변의 보편적 진리인 사랑, 존경, 동정, 이해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우리와 다른 생각, 다른 사람, 다른 문화, 다른 나라에 점점 더 관용적이지 못한다는 말은 바로 그 사랑과 존경과 이해와 동정을 저버리는 것이고 인간성을 망각하는 것이다.
이는 인류가 나가야 할 길을 거꾸로 가는 셈이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을 때 더 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경제발전과 과학기술의 발달 앞에서도 그렇지만 서로 다른 사상, 종교, 주의, 사고가 갈등을 겪을 때에도 우리는 이 인간성만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소위 문화의 갈등이니 문명의 충돌이니 하는 것도 결국 인간성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인류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테러, 국제분쟁, 빈곤, 질병, 인권유린, 환경침해 등이 인간성의 망각과 상실 때문이다.
미국을 보고 대하는 한국의 입장도 무분별한 친미나 무조건의 반미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극단은 다분히 감정적이기 쉽다. 이제 미국을 한국에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용미(用美)"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도 미국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지미(知美)"의 자세가 필요하고 그런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에서 ‘붉은 악마들’의 16강 진출이라는 외침 속에서 달아오르고 있는 월드컵 축구의 열기도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성향을 부채질할 뿐이라는 데서 걱정스럽다.
지금은 모든 일에서 평형과 조화가 긴히 요구되는 때이다. 날이 갈수록 위험요소가 많아지고 커지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좌로나 우로나 어느 쪽으로든지 극단으로 치우쳐서는 안 되겠다. 어떤 사물을 놓고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가름하는 흑백논리가 유용할 때도 있지만 지금은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슬기가 더욱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 안전, 정의, 평화, 번영이 미국만의 그것이 아니고 한국만의 그것이 아니고 일본이나 유럽만의 그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한 자유, 안전, 정의, 평화, 번영이 될 것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지구촌은 속은 분열된 채 겉만 하나인 획일이 아니라, 속으로는 다양성을 그대로 품은 채 조화된 일체를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 그 것은 상생주의를 바탕으로 인류사회의 총체적 가치 극대화를 도모하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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