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비교할 필요는 없겠지만 ‘세계적인 소프라노’라는 수식어가 붙은 한인을 들자면 조수미와 홍혜경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조수미가 수 차례의 공연을 통해 이곳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반면 홍혜경은 거의 소개된 적이 없어 궁금한 음악팬들이 많다. 독신인 조수미가 전세계를 다니며 노래하는 가수인데 반해 ‘3남매를 둔 주부’ 홍혜경은 가정이 있는 뉴욕을 중심으로만 활동해서일까?
세계 3대 오페라 무대인 뉴욕 메트로폴리탄(이후 메트) 오페라에서 18년간 주역으로 활약해온 리릭 소프라노 홍혜경씨를 지난 17일 LA오페라 플라시도 도밍고 단장의 오피스에서 만났다.
이 달 25일부터 개막하는 LA오페라의 ‘투란도트’에서 고결한 사랑의 화신 ‘리우’역을 맡은 그녀는 그동안 오페라에서 보여진 비련의 여주인공보다는 자신만만한 여장부의 인상을 더 많이 풍겼다. 서구적인 당당한 체구와 외모도 그렇지만 인터뷰 내내 보여진 기탄 없이 편안한 태도가 더욱 그런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워낙 성격이 활달하고 외향적인 편인데 오페라 속에서는 맡은 역할에 충실하다 보니 실제 성격도 다소곳하고 내성적이지 않느냐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는 그녀는 "실제 삶과는 별개로 일단 무대에 올라 인물 속으로 얼마나 몰입할 수 있느냐로 오페라 가수의 기량을 가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페라계는 생각보다 매우 터프한 곳"이라는 홍씨는 "실력을 떠나 성격이 소심한 사람들은 견뎌내기 쉽지 않은 세계"라고 덧붙였다. 메트는 모든 성악가들에게는 꿈의 무대고 일반인에게는 클래식의 전당이지만 그럴수록 치열한 적자생존이 횡행하는 세계일 수밖에 없기에 호수 위에 고고히 떠있는 백조들의 물 속 발버둥과 비슷하리란 짐작이 들었다.
이번 무대는 홍혜경씨가 LA에서 갖는 첫 오페라 공연. 그동안 뉴욕의 메트 공연일정 자체가 워낙 빡빡했고 가정주부의 입장에서 장시간 집을 비우기도 어려워 수차례 걸친 초청에 미처 응하지 못했던 탓이다.
홍씨는 "오페라 가수 이전에 가정주부인데 남편과 아이들 셋을 남겨두고 한두 달씩 집을 떠나기는 어렵다"며 "인생에서 가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음악보다 큰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세계적인 소프라노란 수식어보다는 살림 잘하는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삶이 더 중요하다는 그녀는 음악은 삶의 한 부분이지 전부가 될 수는 없다고 분명히 밝힌다.
"무대에서 받는 각광과 명성은 진정한 행복과는 무관하지요. 물론 노래를 통해 큰 기쁨을 얻지만 정말 큰 행복감은 가족들에게서 받습니다"라는 그녀의 인생에 담긴 밑그림은 바로 변호사인 남편과 대학과 초등학교까지 골고루 다니는 3명의 아이들이다.
지난 9월 시작된 메트 2001∼2002 시즌 오프닝에서 ‘리골레토’의 ‘질다’로 출연한 그녀는 10월에 ‘라보엠’의 ‘미미’, 올해 1월에는 ‘이도메네오’의 ‘일리아’역으로 플라시도 도밍고와 호흡을 맞추었다. 이번 LA공연 직전에는 메트 오케스트라 및 코러스와 카네기홀에서 헨델의 ‘천지창조’를 성공리에 마쳤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메트 스케줄만 맞춰도 해가 바뀌다보니 한국이나 외국에 나가 공연하는 것도 쉽지 않은 노릇인데 이렇게 바쁜 홍씨가 공연과 집 외에 다른 일에 좀처럼 엄두내기는 어려울 법하겠다. "지금 살고 있는 뉴욕의 한인사회와는 별다른 접촉이 없는데 연주활동과 가사를 병행하다보면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은 그래서 가감 없이 다가온다.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꿈의 무대에서 소프라노들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질다’ ‘일리아’ ‘미미’ ‘수잔나’ ‘클레오파트라’ 등 수많은 여주인공을 섭렵한 그녀가 ‘투란도트’의 ‘리우’에 대해 갖는 애착은 남다르다. 지난 97년에는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함께 이 역을 선보이기도 했다.
"리우는 숭고한 자기 희생이 깔린 동양 여인의 사랑을 대변하는 매력적인 인물"이라는 홍씨는 "결국 그녀의 죽음으로 얼음장같던 투란도트의 사랑이 탄생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제까지 오페라를 통해 수많은 히로인으로 나왔지만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역할도 없지 않다. 역시 슬픈 사랑으로 삶을 마감하는 ‘나비부인’의 ‘쵸쵸상’인데 목소리의 특성상 자신에게 맞는 배역은 아니라며 못내 아쉬운 눈치다.
입맛 까다롭기로 정평이 난 메트 관객들의 환호를 받으며 세계 최고의 무대를 누빈 그녀지만 이곳 LA 한인들의 열띤 관심이 매우 반가운 기색이다. 얼마 전 조수미씨가 출연한 ‘마술피리’에 보여진 한인들의 성원을 전해들은 홍씨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음악가들에게 쏟아지는 한인들의 사랑은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며 "이번 무대에서 한인 관객들에게 행복감과 함께 자부심을 선사하게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오래 전 홍씨가 ‘라보엠’에 출연할 때 처음 오페라를 찾은 한인들이 그녀가 등장하자 느닷없이 박수와 환호를 보내준 기억이 새롭다는 그녀는 "비록 오페라 에티켓에는 어긋났을지 모르지만 그때 느껴진 그분들의 따뜻한 마음을 늘 잊을 수 없다"고 감사를 전하기도 했다.
"함께 무대에 서면 미국 소프라노들보다 키가 작지 않을 것 같다"고 묻자 그녀는 "단순히 체격뿐 아니라 노래와 연기력도 그들을 능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오기가 있었기에 오랫동안 메트 무대를 지킬 수 있었던 것 같다"며 "소수계 성악가로 누구보다 더 잘하고 싶다는 자부심을 항상 잃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오페라 ‘투란도트’는 25일부터 6월16일까지 다운타운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에서 계속되며 이중 6월7일과 11일을 제외한 모든 공연에서 ‘리우’로 열연할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이재진 기자> jjrh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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