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양반댁 규수들이 시집을 가면 이름이 새로 생겼다. 출신지역에 ‘댁’을 붙인 택호가 평생 그를 지칭하는 이름이 된다. 친정이 안동이면 ‘안동댁’, 수원이면 ‘수원댁’ … 하는 식이다.
“오산리에서 시집 와/오살댁이라 불리는” 농촌 할머니의 삶을 다룬 ‘오살댁 일기’라는 시가 있다. 유종화씨가 쓴 이 시는 한국에서 가난한 시절을 통과하며, ‘교육’만이 가난을 돌파하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믿음 속에 부모도 자식도 허리를 졸라맸던, 지금의 중년층 이상 세대라면 누구나 공감할수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오살댁은 “서울서 은행 다니는/아들 자랑에 해 가는 줄 모르”던 어머니였다. ‘잘난 아들’민수는 동네사람들 눈에도 대단해서 “민수 서울 가던 날/오살댁 인자 고생 다혔구만”하며 모두 부러워했다.
그런데 세상 다 차지한 것 같던 오살댁이 웃음을 잃었다. “아들네 집에 살러 간다고”한바탕 동네를 부산스럽게 하며 보란 듯이 서울로 올라간 뒤였다. “한달만에 밤차 타고 살며시 내려와/정지에 솥단지 다시 걸고 거미줄 걷어내고…오살댁 오늘은 입 다물었다”
성공한 아들의 효도 받을 생각에 흥분해서 서울로 올라간 어머니, 반면 필경 평범한 월급쟁이였을 아들·며느리 사이에 벌어졌을 몰이해와 갈등은 40대 이상 세대에게는 설명이 필요없는 익숙한 광경이다. 나의 이야기이거나, 나의 친구, 그도 아니면 친척의 이야기이며, ‘서울’을 ‘미국’으로 바꿔 놓으면 노부모를 미국으로 초청한 많은 이민1세의 경험이 된다.
지금의 노년층은 숨이 턱에 닿도록 많은 변화를 겪은 세대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한 구비 돌아서면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생경한 세월들을 살아낸 것도 고단한 일이었지만, 노년이 된 지금 가장 가슴 시리게 실감하는 변화는 달라진 가족 개념과 노인의 위치이다.
없는 살림에 부모 모시랴 자녀들 교육시키랴 나 돌볼 겨를 없이 살다 보니 어느덧 노년에 이르렀는데, 그 사이 ‘노인’은 사회적 공경의 대상에서 부담스런 주변적 존재로 추락해 버렸다. 아울러 확고해진 핵가족 개념에 따라 가족은 부부와 자녀를 단위로 하면서 노부모는 자연스럽게 ‘가족’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났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신문 방송 특집을 보다 보니 “새삼 괘씸한 생각이 들더라”고 한 노인은 말했다.
“‘가정의 달’이니 어린이 입맛 생각해서 이런 식당에 데려가라, 이런 곳에 여행을 가라며 온통 관심이 어린이에게 가 있어요. 요즘 부모들이 평소라고 아이들에게 그런 신경 안씁니까? 입맛 없고 외로운 노인들은 안중에도 없어요”
‘가정의 달’ LA에서는 노인 아파트에서 혼자 살던 한인 할아버지가 목매 자살을 했고, 한국에서는 아들부부와 함께 살던 할머니가 굶어 죽은 사건을 두고, 아들·며느리 누구의 책임이 더 큰가를 재판부가 고민 중이다. 일반화할수 없는 개별적인 사건들이지만 노부모나 노인들이 관심의 우선 순위에서 점점 밑으로 내려가는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고, 그 분위기에 우리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개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인생을 4계절에 비유한다면 노년은 겨울이다. 겨울은 근본적으로 쓸쓸한 계절이지만 거기에도 온화한 겨울이 있고, 엄동설한이 있다. 마음이 얼마나 추우냐에 따라 노년의 기후가 달라지는데,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외로움이다. 모든 관계의 맨끝, 변방으로 밀려난 듯한 섭섭함, 배신감, 고독감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노인들 누구나 느끼는 아픔이다.
그런데 그 아픔은 종종 전화 한통 정도의 간단한 관심으로 없어질 수 있다고 얼마전 노인아파트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말했다. 그는 세상의 자녀들에게 이런 충고를 했다.
“정부가 부모 생활비, 의료비 다 부담해주니 미국서 자식 노릇하기 얼마나 쉬워요? 노부모들이 바라는 건 간단해요. 우선 매일은 아니더라도 일주일에 몇번씩이라도 전화해서 안부를 챙기세요. 다음, 부모가 아프다고 하면 여러 말 하지 말고 냉큼 달려와 살펴보세요. 그리고 웰페어로 생활은 되지만 생일이나 어머니날,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 자식이 용돈을 주면 그 돈은 또 특별하지요”
부모의 오늘은 우리의 내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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