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사람들은 원래 자신이 죽을 정확한 시간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 . . 그러나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가져온 이후로 모든 상황은 달라졌다. 인간은 이제 자신을 초월하여 운명을 다스리고자 애쓰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가능성에 도취되어 곧 자신들의 죽는 날에 대한 지식을 잃어버렸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의 말이다. 죽는 날에 대한 지식을 잃어버렸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죽는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거나 회피하게 되었다는 것 일게다. 삶에 경쟁력이 생겼다고 죽음을 외면하는 것은 당연히 지혜롭지 못하다. 이 경우 문명의 발달은 인간의 퇴보와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작년에 김 열규 교수가 펴낸 책의 제목이다. 한국 인문학 영역에서 죽음론에 관한 첫 번째 책일 것이라는 저자의 서문처럼 죽음에 대해 본격적인 자세로 대면코자 애쓴 책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라는 속담처럼 어떻게 살든 일단 살아만 있다면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가치관이 한국사람들에게는 깊이 베어있다. 확실히 한국인은 죽음과 화목하게 지내지는 못하는 편이다. 할 수만 있다면 죽음을 멀리하고자 한다. 그래서 "죽는다"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가능한 한 피한다. "돌아간다", "등진다", "눈감다", "하직한다", "세상을 뜬다" 등등의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교회 마당이 묘지였던 서양에 비하면 한국에서는 절대도 묘지를 마을 가까운 곳에 안 세운다. 더군다나 공동묘지와 마을이 더불어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죽음은 되도록 삶의 현장과는 멀리 떨어져야만 했다. 김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은 죽음을 "왕따"시키는 일
이다. 그렇게 삶과 화해되지 못한 죽음은 늘상 "노상 강도"처럼 찾아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욱 분하고 원통한 것이 되어버린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애써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더구나 죽음이 무시되면 삶도 진지할 수가 없는 법이다. 죽음이 있음으로 해서 삶은 어쩔 수없이 제한된 것이며 일회성이다. 그런고로 진지하고 귀한 것이다. 죽음 쪽에서 삶을 볼 때 그 한번뿐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 인지의 성찰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김 교수는 이 책에서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자" 라고 역설하고 있다.
지난 화요일, 우리 교회에서 최고령이시든 황 윤녀 할머니께서 팔십오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그 분은 새털처럼 가벼우셨다. 체중도 약 구십 파운드 밖에 안되실 정도로 가벼우셨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이 가벼우셨던 분이시다. 마음에 앙금처럼 걸리는 것들이 없을 수 없지만 그래도 그 분에게는 그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할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할머니는 이미 죽음 그 너머에 있는 세계를 분명히 보셨다. 그래서 몇 번이고 병 문안하러 갔던 나에게 말씀하셨다. "목사님, 천국이 참 좋네요." 바램이나 소망이 아니라 실존으로 천국이 그 분 앞에 내려앉아 있었다. 그 분에게 죽음은 노상강도가 아니라 먼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아버지가 기다리는 집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반갑게 밀고 들어서야 할 문에 불과했다. 그래서 옆에서 보고 있는 자녀들의 마음까지 가볍게 해 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가볍게 가실 것 같았던 이 분이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심장과 폐 등 모
든 기관의 기능이 거의 정지될 정도였고 이미 손발에 피가 통하지 않아서 싸늘해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호흡을 멈추지 않으셨다. 의사도 의아해 할 정도로 강한 생명력을 마지막까지 뿜어내셨다. 나중에는 식구들이 지칠 지경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시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에 큰 미련이 있으신 것도 아니고,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못 가실까? 의아했다. 그렇다고 어떤 분들처럼 평소에 인삼, 녹용 등 보약을 많이 드셔서 힘이 비축되어 있는 분도 아니고 위 기능이 좋지 않아 거의 식사도 못하셨든 분이 어디에서 저런 생명의 저력이 나올까 궁금했다. 그래서 한 번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여쭈어 보았다. "하나님, 황 권사님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전해주시려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때 "성실"이란 단어가 내 마음속에 떠올랐다. 그렇구나.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모든 생명 에너지를 마지막까지 다 사용하시는구나.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 해서 당신 몫의 삶을
성실히 감당하시는구나.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결정해주실 때까지 자신의 모든 것이 다 소진될 지라도 스스로는 포기하지 않고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구나. 그리고 그것이 미련이나 집착이 아니라 성실이구나. 그런 깨달음이 왔다. 그 분은 죽음의 자리에서 삶을 설교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들에게 은혜로 베풀어주신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많은 은혜와 기회들을 헛되이 하지 말고 다 쏟아 부어 성실하게 살아라.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자기 몫의 삶을 감당하라. 시간이건 에너지이건 물질이건 낭비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또한 불필요하게 남기지도 말고 다 쏟아 부어라. 마치 훌륭한 마라톤 선수가 골인지점을 통과하고 나서는 전혀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레이스에 다 쏟아 붓듯이 그렇게 쏟아 붓는 삶을 살아라. 이런 말없는 웅변이었다. 그러다가 가실 때는 정작 잠자듯 조용히 가신 그 분의 죽음은 우리의 삶이 훨씬 더 진지하고, 열심히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 성실하고 진지한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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