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110채, 객실 88개 갖춘 ‘월드’호, 지난 3월 진수
배는 계속 세계일주하며 주요 행사 열리는 곳에 정박
은퇴 후의 여생을 호화유람선에서 보낸다면?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카린 플래넷과 남편 제프 톰슨은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은퇴 생활을 이미 누리고 있다.
현재 포르투갈의 타구스강 위에 떠있는 멋진 콘도에서 두 부부는 매니큐어와 골프 예약을 하고, 시원한 베란다에 나와 이웃들과 음식을 나눠먹으며 한가로운 하루를 보낸다. 다음 주는 이탈리아 베니스의 휴양지에서 보낼 계획이며 이달 말에는 영화제가 열리는 프랑스의 칸을 찾을 예정이다.
갑부가 아니면 꿈도 꾸지 못할 것 같은 노후생활이지만 플래넷과 톰슨 부부는 부동산 재벌도, 탈세자들도 아니다. 그저 1,400 평방 피트의 별장용 콘도 한 채를 갖고 있을 뿐이다. 다만 그 콘도가 호화 유람선 ‘월드’호의 10층 갑판에 있다는 사실이 비범하다면 비범하다.
톰슨(59)은 방2개, 욕실 2개인 이 아파트에 대해 "입주 첫날부터 편안했다"면서 "배에서 내린다는 상상은 해보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이 유람선의 독특한 개념 덕분에 톰슨 부부는 내릴 필요가 없다.
바하마의 레지던시 사가 소유, 운영하는 이 2억6500만달러짜리 배에는 모두 110채의 개인 아파트와 88개의 객실 및 다양한 여가시설이 갖춰져 있다. 아파트 소유자들은 배가 계속 세계일주를 하는 동안 어디서든지 맘대로 내릴 수 있고, 또 언제 어디서 정박할 예정이라는 시간표만 알면 언제든지 다시 승선할 수 있다.
레지던시의 유럽마케팅담당 부사장인 한스 크리스티안 매그너스는 "빡빡한 일정에 시달리지 않고 자유롭게 여행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항이나 택시에 시달리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시장이 따로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최근까지만 해도 그 시장을 확보하는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유람선 업계의 거물인 크누트 클로스터 주니어는 지난 90년대 중반에 유람선 콘도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지만 재정문제와 선박건조의 계속되는 지연, 일부에서 제기된 회의론 때문에 자꾸 사업이 지연되는 일을 겪었다. 오랜 고생 끝에 3월29일 오슬로에서 진수식이 열렸고, 명명식은 오는 17일 베니스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월드호는 올 여름 유럽의 여러 항구를 거친 다음 9월3일 보스턴에 입항, 미국에 첫선을 보일 예정이다.
유명 실내 디자이너들이 장식했고 살림살이가 다 갖춰진 2베드룸 2배스, 혹은 3베드룸 3배스의 1106~3242 스퀘어피트 규모 ‘유람선 아파트’ 가격은 240만~700만달러이며 구매자는 500만달러이상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매매계약은 실제로는 50년 간 아파트를 임대한다는 내용으로 나중에 후손에게 물려주거나 딴 사람에게 파는 일이 가능하며, 또한 연간 유지비로 9만2000달러 이상을 내도록 되어있다. 돈은 주로 엔진 수리비나 평면 TV, 웨지우드 도자기, 크리스토플 은식기등을 관리할 가정부를 고용하는 일에 쓰여진다.
꼭 아파트를 사야만 유람선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팔리지 않은 아파트를 한 달에 최저 1만4700달러에 빌려주며, 객실은 1인당 5595달러에 예약해 사용할 수 있다. 객실료에는 북미 지역 특정 도시에서 배가 있는 곳까지의 왕복 항공료, 승선 기간 동안의 음식 및 음료값과 팁이 포함돼 있다.
월드 호의 대그 새빅 선장은 "자신의 요트를 지닌 것과 비슷한데 배의 규모가 훨씬 크고 다른 사람이 대신 몰아준다는 것이 다를 뿐"라고 말한다.
레지던시 관계자에 따르면 아파트 소유자의 약 45%가 미국인이며 평균 나이는 50대 중반, 이곳에서 1년 내내 사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휴가철에만 이용한다.
월드호 안소니 스티븐스 총 지배인은 "우리는 열심히 일해 자수성가한 뒤 수준 높은 노후생활을 누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목표 고객으로 잡고 있다. 유명한 갑부를 끌어들여 선전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전한다. 단기 고객도 받지만 "라스베가스 쇼 스타일이 아니라 삶을 풍족하게 하는 체험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고객을 원한다"고 덧붙였다.
월드호는 카지노와 화려한 나이트클럽도 운영하고 있지만 요즘은 세계 기아 전문가인 조지 맥거번의 강연이나 200석 규모의 강당에서 그 지역 음악가를 초청한 연주회 같은 고상한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도 마련한다.
레지덴시 관계자들은 월드호가 개개의 항구에 평균 이틀 반 동안 장기 정박한다는 것, 올림픽, 국제 테니스대회나 골프대회가 개최되는 시기에 그 장소에 맞춰 정박한다는 것, 월드호의 골프 프로그램이 전 세계 114개 골프장에서 회원대우를 대준다는 사실, 5600 평방피트의 피트니스 센터와 기타 테니스 코트, 퍼팅 그린, 호화 부틱과 레스토랑 등이 즐비하다는 점을 월드호의 특징으로 꼽는다.
하지만 과연 월드호가 경쟁이 치열한 고급 유람선 여행 시장에서 충분한 고객을 끌어들일 수 있을까? 관계자들은 이미 아파트의 80%가 팔렸거나 계약됐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업계 일각에서는 장기 거주자에 의존하는 패턴이 오히려 단점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크로즈 위크의 편집자인 마이크 드리스콜은 장기 거주자와 1-2주만 머무는 사람들의 관심과 수요가 같지 않을 것이고 기존의 소유자들이 침략당했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을 우려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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