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4월말부터 5월초까지 1주일 남짓한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서울에서 30여명의 지인을 만났다. 강산이 변하는 세월이라 ‘서울의 오늘’은 짐작한 대로 낯선 모습이었다. 못 보던 고층건물이 즐비하고 거리는 차량물결로 홍수를 이루며 역동성을 과시했다. 경제가 발전해 수준이 향상됐고 사람들의 씀씀이도 그만큼 스케일이 커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지인들은 삶의 만족도가 10년전보다 별반 나아진 게 없다고 내뱉었다. 오히려 더 떨어진 느낌이란다. 한결같이 "무너진 공교육"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공교롭게도 기자가 만난 지인의 약 80%는 자식교육을 위해 ‘탈 한국’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일부는 ‘비밀’을 전제로 구체적인 복안까지 토해낼 정도로 비장했다.
직장에서 ‘아주 잘 나가는’ 친구들도 다르지 않았다. 언론사 중견으로 일하고 있는 G는 고소득으로 살림에 여유가 있다. 게다가 아내가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어 사회적으로도 말 그대로 ‘빵빵한’ 부부다. 그런데 G는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서 있단다. 당장은 먹고살아야 하니 자신은 당분간 직장에 계속 다니고 아내와 아이들을 먼저 미국에 보낼 궁리중이다. 미칠 정도로 왜곡된 교육현실에 신물이 나 세운 계획이란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의 창업멤버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Y는 미국유학 시절을 잊지 못했다. 귀국해 자리잡기까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다가 자녀가 커가자 교육문제에 대해 심각해 진 것이다. "과연 귀국한 것이 잘 한 것인지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다"는 Y의 심경은 지사를 차리는 형식으로 미국행을 모색하고 있다고 했다. ‘교육 지옥’에서 자녀를 구하고 싶다는 게 그 설명이다.
탄탄한 공기업에서 기획업무를 도맡다시피 하는 실력파 L은 "그동안 회사에서 이만한 위치에 오르기까지 열심히 뛰었지만 이젠 별로 바라는 게 없다"고 했다. "남매에게 남들처럼 과외에 혹사당하지 않도록 하려하지만 가만히 있자니 외톨이가 되는 분위기라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과외를 시키고 있다"며 보따리를 쌀 마음가짐이었다.
북경에서 약 3년간 파견근무를 하고 수개월 전 서울로 귀임한 P는 북경 외국인학교의 영어가 맘에 썩 들지는 않아도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아이들이 영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돼 좋았지만 서울에 되돌아오면서 ‘과외 소굴’에 아이들을 내던진 것 같아 괴롭다고 했다. 초등학교 4학년인 딸이 일주일에 두 번이긴 하지만 밤 9시가 돼서야 귀가하는 모습이 안쓰럽지만 아파트 단지 내 또래들 중 일주일 내내 그러는 아이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얘기다. P는 "이제 살만하지만 이곳에 더 이상 미련이 없다"며 미국에서의 새 삶을 구상하고 있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K는 "학교에서 열심히 하면 왕따 당하기 일쑤이니 대충하게 되고 오히려 방과후 학원에서 늦게까지 열심히 한다"며 취미와 재능을 살리기 위해서라기보다 내신성적 올리기 위해 테니스, 미술 과외를 하는 형편이니 전인교육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불평이다. 또 죽도록 공부해 대학에 간다해도 직장이 보장되는 사회도 아니니 말이다. K는 "아이들은 몸이 힘들고 부모는 과외비 대느라 힘들다. 중학교 들어가면 더 심해지니 그 전에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했다.
한국 공교육 붕괴는 실타래가 마구 뒤엉켜 더 이상 풀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게 중론이다. 그래서 미국 등 외국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짐을 꾸리는 게 상책이란 의식이 팽배한 것이다. 전시 탁상 행정에서 비롯된 비뚤어진 교육제도에, 상대적 박탈감에 유난히 민감한 한국인의 지나친 교육열이 더해졌으니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라고 입을 모은다. 앞으로 제도를 수정했다고 해서 시원스레 풀릴 난맥상이 아니라는 어두운 진단이다.
그러니 미국에서 비교적 여유있게 교육받고 있는 우리의 2세들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도 교육열이 강한 한인부모들인지라 만에 하나 이곳에서도 아이들을 쉴 틈 없이 학원가로 내몰고 있지는 않는지 잠시 되돌아보았으면 한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은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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