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특집 ‘소리 없는 소리’를 찾아서 (2)
▶ 백춘기 <골동품 전문가>
2002년은 ‘말의 해’다. 역술가들은 말의 해를 역마살이 낀 해라고도 한다. 하기야 밋밋하게 지나가는 해 보다는 생동감 넘치는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신나게 달리며 한 해를 보내는 올해가 마음에 든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해외에 나와있는 동포는 너 나 없이 역마살이 낀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면,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 뜯어 들고 이 마을에서 저 동네로 옮기거나, 기차나 고속버스 타고 다른 도로 이사가는 보통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 리가 없다. 숫제 호적 파들고 연락선이나 비행기 타고 태평양을 건너온 이민자들은 마음이 독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때로 미치도록 고향 생각이 나는 것까지 막지는 못한다.
▲양은 우유통
이민 생활 3년이면 찾아오는 열병이 있다. 멀쩡하다가도 불현듯 열이 나고 가슴이 울렁거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안절부절 하면서 당장 가야지 하고 허둥대며 벌떡 일어서는 병. 바로 향수병이다. 세월이 약이라고, 시나브로 가라앉기는 하지만 이민생활 하는 동안 죽을 때까지 떨쳐버릴 수 없는 고향산천병이다.
스코틀랜드에서 이민온 80대 할머니가 한 말을 나는 지금도 좌우명과도 같이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 나의 스튜디오에 찾아온 할머니는 유럽 특유의 귀부인 티가 연연했다. 티파니 샤핑백에서 조심스럽게 끄집어내 내게 건네는 것을 받아든 나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웃었다. 티파니 샤핑백에서 나오는 물건이라는 선입감에서 완전히 빗나갔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느 폐품 수집소나 쓰레기통에서 주워온 것 같은 물건이었다. 양은으로 만든 다 찌그러진 큰 커피포트 같은 통이 나에게 전달됐다. 손잡이가 덜렁거리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다. 어떻게 해서 나를 찾아왔느냐고 물어보았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소개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몸가짐을 다시 하고 할머니와 마주앉았다. 이 할머니는 방금 내가 쓰레기통을 연상시킨 찌그러진 양철통을 고치는데 믿고 맡길 수 있는 골동품 복원가를 찾기 위해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인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문의한 것이다.
나는 부끄러웠다. 소위 골동 복원가라는 자가 설명 한 마디 듣지 않고 쓰레기로 취급해 버린 경솔함과 복원가로서의 자질 부족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이 할머니가 나의 경박함을 눈치채지는 않았을까하는 걱정이 순간적으로 스쳐갔다.
할머니는 스코틀랜드의 작은 목장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엄마의 손에 끌려 젖소 젖을 짜러 다녔다. 그 때부터 젖을 받았던 우유통이 바로 양은 통이었다. 그 우유통의 망가진 손잡이를 고치기 위해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죄송스러워 곁눈질 해보았다. 그 시선은 저 멀리 고향 스코틀랜드 어느 시골 산골짝의 목장을 헤매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잔잔한 호수에 잠겨가고 있다. 할머니와 나는 양은 우유통에서 나오는 ‘소리 없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가운데 손가락에 끼어있는 굵은 다이아몬드 반지가 눈길을 끌었다.
할머니가 현실로 되돌아온 듯 긴 한숨을 섞어 한 마디 했다.
“이 우유통은 고향을 이어주는 나의 탯줄(navel string)입니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골동품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적절하게 표현한 말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떤 서적에서도 읽어본 일이 없었다. 위대한 창작은, 아니 진리는 가장 소박한, 그리고 평범한 상식속에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고 있지 않는가!
▲샌드위치
할머니의 감정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일어나 커피 준비를 하였다. 서두르지 않고 적당하게 시간을 할애하면서 커피 두 잔을 들고 자리에 돌아왔을 때 할머니는 맨하탄 귀부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가벼운 웃음까지 지으면서 커피를 대하는 할머니는 시계를 보면서 말했다. “한 시군요. 여기서 뭣 좀 먹어도 될까요?”
핸드백 속에서 플라스틱 랩으로 싼 샌드위치를 꺼내 천진스럽게 들기 시작했다. 양은 우유통이 나의 탯줄이라 말할 때 눈에 들어왔던 다이아몬드 반지가 지금은 활짝 핀 장미꽃 같이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식사중인 할머니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돌아앉아 우유통을 점검하면서 생각했다.
이민보따리를 정리하면서, 아니면 지금도 여기는 미국이라는 이상야릇한 속물 근성에 빠져 이것 저것 훌러덩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것이 떠올랐다. 손때 묻고 색이 바랜 것은 번쩍번쩍 윤이 나는 것으로, 유행에 뒤떨어진 것은 새로 나온 것으로, 불편하다 싶은 것은 편리한 것으로, 구성진 것은 발랄한 것으로 바꿔치기 위해 마구 버렸던 것이다. 이것들은 한결같이 구닥다리라는 죄명을 뒤집어 서고 가위로 교수형에 처해지거나 불구덩이 속에서 화형을 당했다.
문제는 구닥다리라는 판단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있다. 우리 한국인이 말하는 구닥다리는 유럽에서는 훌륭한 앤틱(Antiques. 100년 이상) 또는 준앤틱(100년에 못 미치는 것)으로 앤틱 시장에서 거래된다.
앤틱과 골동품은 동일어다. 그러나 골동계(골동시장)에서 통용되는 ‘앤틱’과 ‘골동품’의 내용은 한참 다르다. 다음 기회에 이 점에 대해 충분한 지면을 통해 설명하겠으나 우선 단편적으로 알아본다.
동양(한국, 일본, 중국 등)에 있어서의 골동이라는 개념은 귀하고 값진 문화재나 보물이라는 뉘앙스가 강하게 작용한다. 반면 유럽에서의 ‘앤틱’은 옛날의 생활용품이라는 개념이 지배적이다. 미국은 유럽과 동양의 중간치라 할 수 있다.
서양 앤틱(골동품)은 눈으로 보고 동양 골동품은 마음으로 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서양 앤틱은 시각적 미 또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예술성에 비중을 두고 있으나 동양 골동품은 정신세계에서 우러나오는 영적 신비성, 자연미, 심지어 철학적 의미까지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고학 또는 고전적 연구 대상이나 인류문화유산이라는 영역을 벗어나 일반대중사회에서 거래되는 골동품은 연륜, 희소성, 그리고 시각적 미나 예술성이 골동품을 평가하는데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골동품도 어쩔 수 없이 시장이라는 유통질서를 통하여 시장가치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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