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민중이다.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통일되기 일년 전 10월 9일, 동독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평화기도회를 열었다. 군경이 제지하고 나서자 그들은 <우리는 민중이다.> 라고 쓰인 깃발을 치켜들었다. 이 말은 게오르크 위히너 작품 <혁명의 곡> 당통의 죽음에 나오는 기습적인 선언이다. 공산주의 시대에 즐겨 쓰던 외침이 그를 배척하는 구호로 쓰여진 아이러니컬한 장면이다. 국민 스스로 결정한 위대한 거절이며 언어의 함량이 정확한 독일인들다운 의사표출이다. 더욱 놀라움은 동독 정부 당국의 결심이다. 발포는 물론 기도회를 제지하지도 않았으며 민중의 마음이 그들에게서 떠나 있음을 알고 이를 계기로 수치심을 뒤집어쓰고도 국민이 다치지 않게 통일을 이룬 것이다.
베트남은 여름날의 늪처럼 끈질긴 투쟁으로 세계 최강의 미국을 물리치고 통일을 이룬 나라다. 서로 싸우다가도 명절날이면 베트공 형과 정부군 아우가 아버지 집에서 함께 식사하고 쉬다가 헤어지곤 했다는 이야기나, 한국군이 베트공을 취조하다가 참지 못하고 폭력을 쓰면 통역하던 베트남 정부군이 옷을 걷어 부치고 한국군에게 달려들었다는 이야기, 그들도 사상 앞에 민중이 있었다.
전쟁을 체험한 세대의 한국인들은 의식이니 혁신이니 하는 단어만 보아도 과잉 반응을 보인다. 희색 빛이라며 북한의 사상과 동질이라고 찍어 부친다. 한국의 정치가 썩어가고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은 확실히 구분되는 정당이 없기 때문이다. 독약은 소량을 적당히 복용하면 최상의 양약이다. 서구 유럽은 오래 전부터 보수당과 사회당이 서로 선의의 경쟁으로 정치를 잘 해나간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사회당도 색안경으로 본다. 그러나 독도문제 교과서 문제 신사 참배, 자국을 위해서 라면 무엇이든지 뻔뻔해지는 이들은 보수정당인 자민당내의 극우 세력이다.
이제 한국에도 4백만의 민중이 사회주의를 선호한다고 했다. 학생 때 개혁 운동을 한 젊은이들이 40대 나이를 넘어섰으며 동질 정당의 분파가 당파싸움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아는 국민의 숫자가 늘어가고 있다. 아직도 민중이라는 단어만 보아도 지레 겁을 먹는 이가 있지만 국어 사전을 보면 민중이란 최대 다수의 국민이라고 설명되어 있을 뿐이다.
사람만을 바라보고 만든 당은 파당이다. 서로 지나친 불신만을 일 삼는다. 박정희씨도 연좌제를 폐지시키려 나섰는데, 반세기가 지난 지금, 대통령 후보가 얼굴도 모르는 장인이 좌익 했다고 자격시비가 나오고 있다. 조선 시대처럼 3족이 죄를 뒤집어쓰는 작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단 말인가. 그 후보는 장인 문제를 물고 들자 "그러면 내가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라는 말입니까."라고 대답했다는데 민족의 한이 담긴 답변이다.
필자의 아버지는 6.25전쟁에 납북되었다. 어린 눈에도 빨간 완장을 두른 젊은이들이 아버지를 반 강제로 끌고 갔는데도 그동안 월북자 가족으로 취급받아 왔었다. 아니라고 호소해도 내 인사카드에는 언제나 <부친 행방불명> 빨간 글씨가 따라다녔다.
작년에 민주 평통 김민하 수석부의장이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을 때, 공식 석상에서 필자의 아버지에 대해서 놀라운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분 표현에 의하면 동양 최고의 경제학자이며 그분 강의 시간은 타교생까지 넘쳐 났었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김일성 주석이 내려보낸 남쪽에서 데려 올 인사 명단에 부친이 포함되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제자인 김 부의장 형님이 북에 살아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부친 소식을 알아 오겠다고 했다. 그 날 밤 필자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엄청난 정신적 유산을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오래 전 이문열 소설가가 이곳에 왔을 때, 인터뷰는 뒤로 미루고 우리들이 없어진 아버지들 때문에 웅크리고 산 지난 시절에 대하여 한없이 이야기했었다. 그는 오히려 지금 보수주의자라고 개혁세력의 지탄 대상이 되어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아들은 아들이다. 개개인의 사상이 보호받지 못하는, 그런 틀을 깨지 않고서는 통일은 언제 까지나 그저 보기 좋은 구호 일 뿐이다.
일본의 침략에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 물리치는 가상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휴전 후에 태어난 57년 생, 별로 알려지지 않은 김진명씨의 작품이다. 대단한 베스트 셀러 이였다. 민중의 감추어진 마음을 읽은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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