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리 없는 소리’를 찾아서
▶ (1) 백춘기 골동품 전문가
나는 ‘소리 없는 소리’를 찾아 길을 떠나려 한다. 이 길은 차표 한 장 사들고 4박자에 맞춰 신나게, 요란하게 떠나는 여행길이 아니다.
차표 대신 개나리 봇짐 둘러매고 짚신 몇 켤레 허리에 차고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떠나는 뜻깊은 여정이다. 물론 목적은 ‘소리 없는 소리’를 찾기 위한 것이다.
그러다 보면 고갯길에서, 주막에서 듣고 보고 마주치는 세상사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한 마디씩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소리 없는 소리란.
혀 끝에서 나오는 소리는 참새들이 조잘대는 잡소리이고, 혓바닥에서 나오는 소리는 바가지 긁는 마누라 잔소리이고,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는 사랑방 영감님의 헛기침 소리이다. 그러나 소리가 있되 들리지 않는 소리, 바로 소리 없는 소리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이다.
이 정도의 설명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동포 누구나 한 번쯤은 보았으리라 믿는 영화 ‘서편제’의 한 장면을 연상하면, 무릎을 ‘탁’ 치면서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이해가 갈 것이다.
소리꾼이 되기 싫다고 집을 뛰쳐나간 오라비가 어렵게 찾은 소경 누이동생과 주막집에서 마주 앉는다. 손님의 청에 따라 소경 소리꾼이 남도창을 부르기 시작한다.
한 고비 두 고비 깎아지른 것 같은 소리고개를 꺾어제치며 넘으면서 소경 소리꾼은 앞에 앉아있는 손님이 집을 나갔던 오라비라는 것을 가슴과 오장의 느낌으로 감지한다.
그러면서도 소경 누이동생은 그동안 아버지와 자기를 버리고 집을 나간 오라비에 대한 야속함과 자식을 원망하며 숨을 거둔 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눈 먼 사연 등으로 가슴이 끓어오름에도 이를 나타내지 않는다. 대신 이 모든 감정을 한 가락 소리에 담아 피를 토하면서 천길 만길 드높은 소리고개를 기어오른다. 이 처절한 장면을 영화는 벙어리로 처리하고 있다.
그러나 관중은 벙어리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소경 소리꾼의 판소리에 가슴이 미어지고, 오장이 찢어졌으리라! 이것이 바로 ‘소리 없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지상의 소리와 지하의 소리
현대문화를 제1의 문화권, 근대문화를 제2의 문화권으로 분류할 때 고전문화는 제3 문화권에 속한다. 고고학은 바로 제3 문화권을 다루는 학문이다.
유사(有史)문화를 크게 선심 써서 5,000년이라 할 때 여기에서부터 소급되는 만년, 10만년, 100만년으로 뻗어가는 인류 역사는 고고학의 몫이다. 이렇게 볼 때, 유사문화 역사 5,000년이란 가소로운 세월이지도 모르겠다.
사실 고고학의 연구 대상은 거의 지하에 있다. 그리고 그 범위는 전 지구이다. 지하를 비집고 들아가며 인류의 조상을 밝혀내고, 미세한 돌 파편을 통해 창세기적 인류문화를 정확하게 알아내고 있는 오늘의 고고학자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지하에는 소리가 없다. 물론 빛도 없다. 그 속에 묻혀있는 인류의 문화유산은 인간의 손에 의해 발굴돼 지상에 나왔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고 소리를 낼 수 있는 것들이다.
이 빛과 소리는 지상의 빛과 소리와 합류하여 또 다른 문화가 창조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고대와 현대의 조화라는 새로운 예술문화 영역을 연출한다.
맨하탄에 있는 일류 백화점이나 일류 디자이너들이 운영하는 고유 브랜드 상점들의 쇼룸이나 쇼윈도우, 어디를 가보아도 골동품 한 두점이 장식돼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그 골동품이 연출하는 예술적, 선전적 효과란 실로 지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전과 현대의 조화란 비단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사회, 문화, 예술, 심지어 안방 깊숙히 파고들어 인간의 사고방식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 오늘의 실상이다.
▲현대와 고미술
현대문화예술은 자본주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돈의 문화’다. 모든 예술 가치는 애당초부터 ‘투자’라는 자본주의적 발상에서 이루어지고 시장을 통해 예술성이 아닌 시장가치를 가지고 평가되고 거래된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문화예술은 인간의 속물성을 자극하고 만족시키는 데 급급한다. 왜! 거기에 돈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질서 속에서 예술성과 시장성이 충돌하였을 때 시장성이 우선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런 현상은 결코 문화예술인의 탓이 아니다. ‘물’과 같은 속성이 있는 ‘돈’의 생리는, 거기에 돈벌이가 있다면 시궁창도 마다하지 않고 파고 들어가는 것이 ‘돈’이라는 것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대문화예술의 반대편에는 지금 고전에 강한 애착을 불러 일으키는 고미술(골동품)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 바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현대 문명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유럽에서 강하게 불고 있다. 만일 이런 운동마저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현대문명은 신경쇠약에서 오는 정서불안증에 빠져들고 말았을 것이다.
고전에 대한 애착은 인류의 내일을 위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고전과 현대는 서로 단절된 별도의 세계가 아니다. 단절되었다가도 바로 예술운동이 매개체가 되어 다시 이어져 오늘에 이르는 인류문화이다. 때문에 고전과 현대는 등을 돌리는 이질문화가 음과 양처럼 서로 절실히 필요로 하는 동반자 관계이다.
고전예술의 뒷받침 없이는 현대예술이라는 자체가 창출될 수 없다. 현대예술은 인간 개개인의 탈렌트를 극단적으로까지 요구하면서 예술성을 극한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렇지 않고는 어떠한 만족도 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사막의 모래알은 대중 속에서 혼자 춤추는 장미꽃 같은 탈렌트 문화만을 요구하고, 그 주범이 바로 현대예술이요, 예술인이다.
▲골동 세계
골동품(고미술)은 고전문화에 속하는 예술품이요, 생활용구이다. 골동품은 지난 인류문화역사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때에 따라서는 혀로 맛볼 수 있는 인류문화유산이다. 때문에 기록되어온 인류 역사가 종이 위에서 죽은 역사라면 골동품은 살아 숨쉬는 역사이다. 때문에 골동품은 무기체가 아니라 선대의 사상과 인격이 담겨져 있는 유기체로 대접을 받는다.
나는 골동품 복원가로서 골동 애호가들이 부서진 자신의 골동품을 들고와 눈물짓는 것을 보았고, 그런 골동품을 혼신의 정성을 기울여 복원한다. 복원되어가는 골동품을 지켜보면서 나는 몇 백년, 몇 천년 전의 숨소리를 듣는다. 골동품은 소리 없는 소리의 실체이다.
▲백춘기 골동품 전문가
저자 약력
1934년 전주 출생
일본 와세다대 정경학부 3년 수료
한국전력 서울지점 근무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한국지부 이사
1988년 미국 이민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고미술 복원 과정 수련
내셔널지오그래픽 고적탐사대 멤버
뉴욕 골동품 복원가 협회 디렉터
동양 골동품 복원사 운영
현 골동품 복원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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