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일치일란(一治一亂)의 반복이다. 치세(治世)와 난세(亂世)의 교체가 바로 역사다. 엄청난 역사의 경험에서 나온 중국인의 전통적 역사관이다.
‘난세에는 누항(陋巷)에서 인물이 나온다’-. ‘치란’(治亂)의 역사관이 보여준 지혜다. 이 말은 일종의 영웅 대망론과도 통한다.
난세의 징조가 뚜렷해진다. 민중은 고난에 빠져든다. 장기간의 정치적 혼란, 뒤따르는 위기속에서 민중은 고통속에서 구해줄 존재를 열망하게 된다. 그 기다림은 미륵사상(彌勒思想)으로, 또는 ‘메시아니즘’으로 표출된다. 어떤 형태든 현실의 고통속에서 그들을 건져줄 인물을 기대하는 것, 이것이 영웅 대망론이다.
악을 소탕하는 영웅의 출현과 함께 난세는 끝나게 돼있다. 세상은 치세(治世)로 접어들고 영웅은 새 왕조를 세운다. 그러다가 왕조를 지탱해온 개혁의 이상이 빛을 바래면서 부패가 만연한다. 다시 세상은 난세로 빠져드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 아니 동양의 역사는 어찌보면 ‘일치일란의 패러다임’에 갇힌, 판에 박힌 순환의 역사일 수도 있다. 개혁을 내걸고 들어선 왕조가 ‘황당하다 못해 현묘하기 까지한 제왕학’(帝王學)에 빠져들면서 민중의 여망을 저버릴 때 다시 난세가 찾아드는 것으로 역대 왕조의 스토리는 일관돼 왔기 때문이다.
성경의 이야기는 그러나 이와 상당히 다르다. 사사기에 나오는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의 박해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해낸 영웅이다. 그에게 사람들은 이렇게 요청한다.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려 주십시오.” 기드온은 그러나 거절한다.
조지 워싱턴의 스토리도 비슷하다. 그는 미건국의 영웅이다. 그는 자체로 신화다.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다. 최소한 계속 대통령으로 남아 있기를 원했다. 워싱턴은 모든 제의를 물리친다.
기드온은 여호와를 바라보았다. 워싱턴은 역사를 내다보았다. 스스로 영웅의 자리에서 내려옴으로써 영웅의 신화를 걷어낸 것이다. 신화의 영웅은 정치 현실로 들어가는 순간 권력의 화신으로 변한다. 권력은 그 자체로 부패하게 마련이다. 권력이 영웅화되고 인격화된다는 것은 스스로 지닌 불합리와 비효율성 때문에 반(反)역사적이다.
절대자 앞에서, 역사 앞에서 겸허함으로써 이들은 혜안을 가지게 된 건지도 모른다. 이들이 써간 역사는 그러므로 ‘치란(治亂)의 순환고리’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판에 박힌 역사와는 다른 역사가 된 것 이다.
‘3홍’(弘)이 난리다. ‘현철비리’로 한바탕 난리를 친 게 불과 5년. 이번에는 DJ의 홍(弘)자 항렬 세 아들 비리로 한국이 뒤집어지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한국의 정치현실은 여전히 영웅시대에 머무르고 있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아버지가 군주라면 그 아들도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권력의 인격화, 권력의 세습화 인습이 아직도 뿌리 깊다는 증거다.
권력이 인격화 된 상황에서는 권력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법보다는 ‘김심’(金心)이 더 중요한 게 다 그 이유다. 이 상황에서 대통령의 아들은 당연히 무소불위한 권력, 그 권력의 분신으로 비쳐지게 돼 있다.
역대 한국 대통령은 영웅신화의 미몽(迷夢)에 사로 잡혀 모두 실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근대화의 영웅으로, 또 민주화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영웅으로 스스로를 착각, 권력을 인격화하고 정치를 신화했다. 때문에 권력의 중심에 선 그들은 비판의 무풍지대에 있었다. 그 결과는 하나같이 비극이다.
권력의 인격화는 DJ정권이 들어선 후 오히려 심화된 느낌이다. 오랜 세월 지역차별의 희생자가 DJ였다. 그는 한(恨)과 수난의 상징이었다. 이런 DJ는 벌써부터 많은 지지자에게 영웅으로 뚜렷이 부각돼 있었다. ‘노벨상과 햇볕정책이 DJ의 제왕학’(帝王學)으로 덧입혀지면서 영웅신화의 몽환에 더욱 빠져든 게 아닐까 싶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3홍 사태’는 그 윤곽이 더 뚜렷해진다. ‘난세’(亂世), 아마도 해방 후부터의 오랜 난세를 마감하고 ‘치세’(治世)로 전이되려는 과정의 마지막 푸닥거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것은 일그러진 영웅 신화를 추방하는 의식으로, 민주사회가 성숙해 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치러야할 통과의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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