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랍의 오일카드와 미국의 달러 외교
▶ 정수익(퍼스트 아메리카 투자사 한국담당 부매니저>
경제현상은 살아있는 생물체와 같아서 잘 나가다가도 어디 한 부분이 시원치 않으면 특별한 주의를 요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최근 이스라엘-팔레스타인간의 분쟁이 악화되며 원유가가 급등하자 일부 언론과 전문가들은 이번 중동 위기가 지난 1973년 1979년 경우처럼 유가파동으로 인한 제3의 오일 위기를 초래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글로벌 경제를 침체상태로 빠뜨릴지도 모른다고 소란을 피운다.
불과 지난 3월 중하순까지만 해도 연준리 의장 앨런 그린스펀을 포함한 많은 경제 전문가들은 미국 경기가 확실한 회복기에 들어갔다고 발표하기 바빴고 올해의 경기회복 속도는 예상보다 빠른 V자형 회복이 될지도 모른다며 월가를 흥분시켰던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그렇다면 과연 이번 중동사태는 제3의 글로벌 경제 위기로 이어질까? 대답은 회의적이다. 우선 1973년 오일위기 이후 서방경제는 생산 및 소비 활동 면에서 에너지 효율을 크게 높이고 오일 의존도를 낮추었다. 또한 국제 원유시장은 오일 수급원 면에서 비아랍권으로부터의 공급 쿠션이 커졌다는 점이다. 몇몇 중동 산유국들이 오일 금수 또는 감산 조치를 취하는 경우 단기적으로는 미국과 긴밀한 이해 관계에 있는 멕시코, 캐나다, 영국, 노르웨이, 러시아 등 비OPEC 산유국들이 어느 정도의 증산 조치를 통해 이 공백을 채워줄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 대부분이 회교도 국가인 OPEC 산유국들이 정치·경제적으로 모두 이해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난 8일 이라크가 향후 30일간 오일 수출을 중단한다고 발표하고 아랍 국가들의 동참을 촉구하자 국제 원유가는 일단 급등했다. 그러나 다음날 OPEC 제1 산유국인 사우디와 쿠웨이트는 이라크의 입장에 반대의사를 표명했으며, 그 나마 오랜 이라크의 적대국인 이란과 시리아 역시 다른 아랍국가들이 동참할 경우에 한해 오일 금수조치를 지지한다며 미온적 지지의사를 밝혔다.
이들 아랍 국가들에게 있어 오일은 여전히 강력한 대미 압력용 협상 무기이지만 동시에 유일한 달러 수입원이다. 아랍권의 정서로는 미국은 큰 적이지만 또한 이들에게 미국은 잃어버리기에는 너무나 큰 고객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이들이 오일 카드를 정치적 협상 무기로 이용하는 데 그칠 가능성이 크며 경제적 위협용으로 중장기간 이용할 가능성은 적다는 것이다. 특히 오일 금수조치로 인해 자본주의에 크게 익숙해진 OPEC 제1 산유국인 사우디는 1973년 이래로 누려온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적 반사이익을 완전히 상실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시나리오는 미국 등 서방 선진국들이 어떻게 아랍권의 반미 정서에 여하히 대응하느냐에 따라 급변하는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현재 아랍권 내부에서 형성되고 있는 반미 무드가 심상치 않다. 1979년 아랍권 최초로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맺었던 이집트의 무바라크 대통령도 미국의 대 팔레스타인 정책에 크게 불만을 표시하고 대 이스라엘 외교단절 가능성을 시사했으며 아랍권의 각국 지도자들 또한 팔레스타인 지도자 아라파트에게 힘을 실어주는 분위기다.
만일 현재 상태에서 아랍권이 미국의 대 팔레스타인 정책에서 어떠한 양보도 얻어낼 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경우 이들에게 있어서 이들의 유일한 협상 무기인 오일카드는 달러파워를 능가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급진 회교도들은 13개 OPEC 국가 중 10개국이 이슬람 국가라는 점을 강조한다.
실제로 지난 1, 2차 오일 위기에서 경험했듯이 이들의 감산조치가 중장기화 될 경우 유가 상승으로 인해 특히 부채에 시달리고 있는 제3 세계권이 큰 경제적 타격을 받을 것이며 이는 곧 글로벌 경제를 다시 침체로 몰아넣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시나리오가 현실화 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물론 미국 및 서방 선진국들의 적극적 외교 노력이 꾸준히 추진된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이미 부시 행정부는 그동안 대 팔레스타인 강경노선에 의해 그늘에 가려져 있던 온건파 콜린 파월 국무장관을 중동에 파견하여 아랍권 달래기 조치를 시도했지만 그의 외교적 성과는 미미하다. 미국의 지속적 대 아랍 강경책이 변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랍권 또한 달러 파워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다. 현재 미국과 아랍 산유국들이 유념하고 있는 것은 각각 오일 카드와 달러 파워이다. 미국과 아랍 산유국들은 서로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알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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