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봄의 행사로 전 학교 입학 시즌에 될 때는 매우 춥다. 양지 바른 곳 햇볕에 웅크리고 앉아 있으면 따뜻한 햇살은 언 볼을 녹여 줄만 하다. 손을 호호 불면서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고 종종 걸음으로 걷는 초등 1학년 입학생들은 오른 쪽 가슴에 자기 이름패를 달고 엄마 손을 잡고 학교 가는 것을 상상하면 풋풋한 고향의 정이 온몸으로 배여 온다.
처음으로 학교 간다고 설레어 밤잠도 설친 아이들 7살짜리 언 손을 잡고 언 발을 동동거리고 처음으로 낯선 학교를 가면 부끄러워 엄마 치마 숨에 안 떨어지는 아이들을 간신히 떼어서 같은 반줄에 세워 놓고 쳐다보면 흐뭇해 세상이 내 것인 갓 인양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학교 첫날엔 의례 추운 날씨이다. 집에서만 있던 아이들을 차가운 바람의 마당에 나란히 세워 놓으면 아이들은 엄마가 어디 있나 목을 빼고 있다.
첫날이라 개교식이 거행되어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하고 애국가가 흘러나오고 그 다음은 교장선생님의 훈시가 할 말이 많은지 길어진다. 마당에 서있는 아이들 추워서 발을 동동 구르며 추워하는 아이들 보며 어린 엄마들도 같이 동동거린다. 그러다 한 엄마가 안 가져온 것이 생각이 나는 것이 있었다.
처음 학교 등교하는 아이의 준비물을 챙긴다고 하였지만 안 가져온 것이 있어 아이에게 잠깐 집에 갔다 올게 하면 아이는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인다. 낯선 학교에 엄마 마저 없다고 생각하니 두려운 것이다. 그런 아이를 단단히 이른다.
“선생님 말 잘 듣고 있어 금방 갔다 올께” 하고 집에까지 달려가서 가져오면 아니는 엄마가 언제 오나 자기 줄에 기다리다가 아이들 따라 교실에 들어가고 엄마가 오는 것을 기다리다 제 이름 부르는 것도 모르고 대답을 못한다. 선생님은 큰소리로 아이 이름을 부르면 선생님의 큰 소리에 놀라서 “예” 하고 큰소리로 대답을 하면 반 아이들이 하하 웃는다.
늦게라도 돌아와 준 엄마가 반갑다. 아이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나고 엄마가 좋았다. 그 날 하루는 그렇게 하여 첫날 학교를 끝이 난다.
학교가 끝이나 나오면 학교 담벼락에 바람막이로 앉아서 노란 병아리를 팔고 있다. 털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노란 병아리를 커다란 바구니에 넣어 놓고 한 마리에 1,000원이요 한다. 그 병아리들이 삐악 삐악 하는 소리는 산소처럼 맑았다. 개나리꽃이 활짝 핀 것을 보게 한다.
처음 학교 나온 아이가 엄마에게 보챈다. “엄마 저 병아리 엄마 사줘” 엄마는 “안 돼” 하지요 “엄마 나 사주어” 하며 조른다. “엄마... 응응” 치마꼬리를 붙잡고 안 놓아주면 “이 녀석 네가 기르니 내가 기르지” 하신다. 아이는 엄마 내가 잘 기를게, 물도 잘 주고 모이도 잘 주고, 내가 똥도 치울게 하며 조른다. 마지못하여 아이 선물로 병아리를 사오게 된다.
아이는 삐악거리는 병아리를 하루 이틀은 데리고 물도 주고 모이도 주지만 다음에 잊어버려 모른다. “철수야 네 병아리 모이 주었니” “똥 치워라” 하고 소리 지르게 되고 아이는 들은 척도 안 하고 그 다음은 엄마 차지다. 그 병아리가 커지면 미워지고 똥을 아무 데나 싸고 다니니 귀찮아 지기 시작하게 된다. 나중엔 애물단지로 전락을 하여 버림을 받게 되어 이웃집에 보신탕으로 주게 된다. 아이를 가진 엄마들은 한번쯤 겪는 일일 것이다.
내가 어릴 적에 엄마를 졸라서 병아리를 두 마리 사서 길렀다. 내 동생은 네 살배기다. 이 병아리가 앞마당으로 뒷마당으로 삐악삐악 하며 돌아다니고 노랗고 예쁜 병아리 뒤를 동생은 눈만 뜨면 따라 다닌다. 나도 학교 갔다 오면 병아리야 소리를 지르면서 뒷마당으로 달려가 동생과 같이 합세를 한다. 병이리 뒤를 쫓아다니며 모이를 주고 물도 주고 동생과 같이 사랑을 주고 있었다.
병아리 사온 일주일쯤 되는 날 학교를 갔다 오니 동생이 안 보인다. 병아리도 안 보인다. 이상하여 엄마를 찾으니 엄마가 어디를 가셨는지 안 보인다. “청자야” 하고 부르니 대답이 없다. 앞마당 뒷마당 찾아보니 변소 옆에 웅크리고 숨은 동생을 발견하였다.
“야 너 여기서 무얼 하니”
“언니야 병아리 내가 안 밟았어” 하며 울먹였다.
병아리는 이미 빳빳하게 몸이 굳어 있고 날개를 오므리고 모로 누워 있었다.
죽은 병아리가 슬퍼 보이고 불쌍하였다. 그걸 보니 화가 나서
“네가 죽였지?” 하며 엉엉 울어 버렸다.
“엄마 청자가 내 병아리를 밟아 죽였어” 악을 쓰고 울었다.
옆집 갔다오던 엄마가 울음소리를 듣고 뛰어와
“요 못된 것 왜 어린 병아리는 밟아 죽이니” 하며 빗자루로 때려주고 동생은
“내가 안 죽였어” 하며 울고, 나는 내 병아리 죽었다고 울고, 온통 집안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언니가 학교서 돌아오더니 “야 순이야 내가 더 예쁜 것 사다 줄게” 하며 달래 주어도 “아니야 그걸로 가져와” 하고 더 울었다.
동생은 울다 잠이 들었고, 나도 언제 잠이 들었는지 자고 아침이 일어나니 노란 병아리가 내 옆에서 삐악 삐악 하고 있었다. 그 병아리가 예쁘지만 죽은 병아리가 더 예쁘다고 생각하였다. 바쁘고 팍팍한 생활 속에서 잠시 가져 보는 작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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