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하와이에서 본국 민주당의 국민경선 과정을 지켜보며 ‘세상이 많이 변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변했다는 느낌이 들 때 이미 역사는 변화되어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이런 모습의 대통령 선거는 ‘제왕적 대통령’ 또는 ‘3김 정치’하에서 50년 가까이 지내온 한국 국민들에게는 상상조차 할수없었던 일이다.
경선 뚜껑이 열리기 직전까지만 해도 그 많은 정치평론가들을 포함해 언론 일반에서도 이 정도의 ‘노무현 돌풍’을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이념논쟁’이니 ‘색깔논쟁’등이 등장하는 요즘 본국 민주당 경선과정을 지켜보면서 다소간의 우려와 함께 ‘룰의 정치’에 대한 원칙의 중요함을 다시한번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노무현씨와 이인제씨는 민주당의 ‘동지’다.
그들은 민주당이라는 틀 안에서 대통령후보 예비경선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경선 과정이야 말할 것도 없이 후보로 확정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일단 누군가가 승리를 하게되면 상대방은 미련없이 ‘승자의 손’을 들어주어야 한다.한나라당과의 ‘진짜 승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전개되고 있는 양상을 보면 과연 그렇게 될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정치, 특히 우레 같은 박수와 지지속에 매일을 보내는 ‘선거운동’을 해보고 나면 그 열병을 잊기가 힘든 게 사실이다.어차피 승부는 나게 되어있기 마련이지만 박빙의 승부일수록 ‘나를 지지하는 사람이 더 많을수 있다’는 자기 집착이 오게 되기 때문에 미련없이 훌훌 털어버리고 같은 당의 ‘동지’를 위해 백의종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정치권에서는 그것이 매우 자연스러우면서도 당연하게 지켜지고 있다.지난번 미국대선당시 민주당의 고어후보는 ‘일반 유권자투표’에서는 이기고도 ‘승자독식제’(winner takes all)의 미국 선거인단 투표에서 지는 기막힌 상황끝에 법정개표상황까지 갔다가 여론이 식상해하는 느낌을 보이자 지체없이 ‘승복’을 선언하고 부시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우리의 정치인들은 구차한 ‘이유’가 너무 많다.
‘노무현 바람’의 진원지는 정당도 어디도 아닌, 개혁세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의 정당은 ‘이념’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인 정당이 아니다.
현 정권이 ‘좌파적 정권’이라고 주장하는 이회창 전 총재의 한나라당 내에도 5공세력,민주화세력,구 민정계,운동권세력등 온갖 성향의 사람들이 다 모여 있으며 이것은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의 그들은 다만 선거때 유리한 정당(특히 지역주의에 기초한)을 택해 수시로 이합집산을 거듭해온 것이 지금까지 우리의 정당사(政黨史)다.
지금의 ‘노풍’에 모두가 놀라워하고 있는 것은 정치인들이나 정치분석가들이 아직도 ‘지역주의에 기초한 선거판세’라는 그동안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게모르게 최근 10여년간 확장되어온 ‘변화를 희구하는 세력’에 대해 과소평가한 측면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 좌파니 우파니 하는 논란은 적어도 범사회적으로는 소모적인지도 모른다.
일부 극소수에 정말 ‘좌파 같은 사람들’과 ‘극우 같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국민 일반의 호응도 지지도 받는 형편이 아니다.다만 ‘변화를 원하는 층’은 분명히 있다.그것을 ‘개혁세력’이라고 이름붙일수 있다면 지금 노무현 바람의 진원은 바로 그 개혁세력이다.그것은 경선의 승리여부를 떠나 한국사회가 새롭게 인식해야할 사회의 한 단면이다.
‘5공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던 노무현씨는 그동안 거침없이 개혁적 입장에서 행동과 발언을 해왔다.다만 그 발언이나 행동이 현실정치권의 틀안이었기 때문에 ‘찻잔속의 태풍’이었을 뿐이며 그 바람의 반향을 검증해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직접 대면에서 예상외의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인제씨도 경기도지사 시절이라든지 노동부 장관시절등의 치정을 볼 때 상당히 진보적이면서도 개혁적인 인물로 그동안 알려져왔다. 그러나 지금은 상대적으로 노씨에 비해 보수적인 이미지를 자임하고 나섰다.그것이 득표에 유리하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풍’의 기세는 꺾이지 않고 있다.특히 지역을 막론하고 노풍의 질주가 계속되고 있는 것은 적어도 이번 선거가 지역구도로 치러지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게 하고 있다.거기에는 호남후보가 없는데다가 DJ도 현실정치권과는 거리를 둔듯한 모습을 보여 영남권에서의 ‘반DJ’ 반사효과가 현저히 저하된 탓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 분명한 것은 한국사회에 개혁, 또는 혁신을 원하는 국민들이 상당부분 엄존하고 있다는 것이며 어떤 지도자를 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유권자인 국민들의 문제다.
정치인들의 계산이란 참으로 미묘하고 치밀한 것이어서 지금 이기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결정적인 곳에서 질수가 있으며 지금은 지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극적인 반전을 이뤄내기도 한다.
지금 노무현씨와 이인제씨의 경선싸움도 긴 마라톤의 한 과정이며 결선 레이스는 연말에 치러질 대선이다.
그 대선이 노무현씨의 구도대로 보혁대결로 가게 될지, 이인제씨의 희망대로 이회창전총재와 ‘대세론’끼리의 대결로 가게될지는 이 시점에서 아무도 모른다.그리고 이 사회에 ‘그냥 이대로’의 안정을 원하는 세력이 더 많은지, ‘무엇인가 바뀌어야 한다’고 변화를 원하는 세력이 더 많은지도 아직은 모른다.
다만 우리 동포들이나 국민들은 누가 이기든 원칙을 정해놓은 룰 안에서 최선을 다해 승부에 임하고 결과가 나오면 멋있게 승복하는 세련된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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