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주 대도시의 중산층 주거지역에 사는 한 가장이 일전에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을 데리고 변두리의 농가를 찾아갔다. 시골 빈농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가를 체험토록 했다. 이틀 밤을 지내고 농가를 떠나는 차안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다. “이 세상에는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단다. 너도 보았겠지만 이 농가에 사는 아이들은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고 먹고 싶은 것을 맘대로 먹지 못한다.”
그러자 아들이 답했다. “아버지 말이 맞아요. 세상에는 남보다 못한 환경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금지옥엽으로 아끼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만족스럽다 못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신의 현장교육이 성과를 거두었다는 뿌듯함에 젖었다.
그러나 이내 아들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버지, 우리 집엔 개가 1마리밖에 없는데 그 집에는 4마리나 있었어요. 그 집에 사는 아이들은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아버지, 우리 집 마당은 보통 넓이지만 그 집은 마당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어요. 들판이 온통 마당이었어요. 그 집 아이들은 아무리 뛰어 놀아도 주위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거예요.” “나는 우리 집이 그 농가보다 훨씬 가난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아버지 이런 기회를 갖게 해 주어서 고마워요.”
아들의 깨달음에 아버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들에게 가난한 이웃이 있음을 보여주려 했으나 정작 아들은 자신이 ‘진짜 가난한 사람’임을 느꼈으니 아버지가 당혹스러워한 것은 당연하다. 아버지가 보는 세상과 아들이 보는 세상은 하늘과 땅의 차이를 드러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어 주려한 의도가 정반대의 결과를 낳은 것이다.
세상은 하나지만 이처럼 ‘어른 세상’과 ‘어린이 세상’은 판이할 수 있다. 부모는 ‘어른 세상’의 컬러대로 ‘어린이 세상’을 채색하려 한다. 하지만 억지를 부리면 반드시 무리가 따르게 마련이다. 어른은 “어린이를 위해서”라지만 자신의 가치를 자녀에 투영하려는 것일 뿐이다.
영어발음을 원어민에 가깝게 한다는 이유로 한국의 부모들이 자녀를 병원에 데려가 혀 수술을 받도록 한다는 웃지 못할 일이 LA타임스에 대서특필됐다. 한국인들에게 까다로운 ‘L’과 ‘R’발음 구분을 위해 5세 미만 어린이의 혀 아래 부분을 절단해 1~2mm 길게 한다는 이야기다.
비용이 230-400달러 정도이고 국부 마취한 채 10분 정도면 끝난다니 수술 자체가 큰 부담을 주지는 않겠지만 원어민처럼 발음을 해야 한다며 자신을 병원으로 끌고 간 부모가 아이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쳐질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린 자녀의 몸에 칼을 대면서까지 남을 흉내내려는 부모가 줏대 없이 보일 수도 있다.
‘어른 세상’을 주입시킨 부모는 자녀들과 함께 그 대가를 치를 공산이 크다. 상당수 한인 부모가 “자녀들이 잘 먹고 잘 살도록 하겠다”며 어려서부터 적성에 맞지 않는 전공을 선택하도록 노골적으로 압력을 행사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 소위 ‘안정되고 잘 나가는’ 인기직종을 미리 정한 뒤 아이들의 진로를 이에 맞추려는 경우가 그것이다. 자녀가 잘 따라주면 탓할 일이 아니지만 부모의 강권에 떠밀려 선택했을 때가 문제다. 대학에 들어간 자녀가 전공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고 방황해 교육상담가를 찾는 학부모가 증가하고 있다는 현실이 이를 반증한다.
‘어른 세상’이 ‘어린이 세상’에 강요되는 것은 세상이 어지러울 때 그 도를 더해간다. 이스라엘을 상대로 민족의 사활을 건 투쟁을 벌이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어린이들에게 자살폭탄테러 행위를 ‘천국에 이르는 문’으로 미화하고 있다.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과 맞서려니 뾰족한 대안이 없을지 모르지만 어린이들의 허리춤에 폭탄을 두르면서 “순교자가 될 수 있다”고 독려하는 것은 너무나 비인간적이다.
불의에 분연히 일어서야 한다는 정의감보다 인간 자체에 대한 혐오감이 어린이들의 가슴에 박히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자녀의 입신양명, 민족자결 등 어른들이 내세우는 명분에 ‘어린이 세상’이 얼룩지고 있다. ‘잔인한 달’ 4월을 맞아 “내가 지금 아이들의 눈을 가혹하게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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