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끊임없이 이동하는 존재다. 부단히 이동하는 인간의 모습은 성경 창세기에도 강렬히 각인돼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노마드적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로마로 몰렸다. 장안(長安)으로 몰렸다. LA로 몰린다. 인류사상 가장 개방적인 세계 제국이 로마였다. 당(唐)나라였다. 미국이다. 로마와 장안(長安). 한 때 세계 제국의 화려한 수도였던 이곳에 세계 각처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꿈을 안고 찾아왔던 것이다.
사람들은 왜 몰려들었을까. 풍요 때문이었을까. 화려함 때문이었을까. 문명의 빛을 계승한 곳, 모든 것을 수용하는 세계 제국의 수도가 지니고 있는 개방성이 사람들을 끌어 모았던 것이다.
인간 이동의 물결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이민의 형태든, 난민의 형태든 그 움직임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인간의 이동은 그렇지만 항상 ‘일방통행적 현상’을 보이고 있다. 어두움을 떠나 빛으로, 죽음의 동토를 떠나 생명력이 넘치는 땅으로의 이동이 그 패턴이다. 인간의 이동은 그리고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인간의 이동, 일방통행 현상
오늘날 존재하는 전 세계 국가의 3분의2는 반세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1950년에서 1990년 기간에 탄생한 국가는 한해 평균 2.2개를 기록, 1900년에서 1950년 기간 연 평균 1.22개에 비해 두배 정도의 증가율을 보였다.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인 1990년대에는 더 엄청난 변화가 따랐다. 해마다 3.1개의 신생국이 태어난 것.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20세기 후반 세계의 정치지도는 큰 변화를 겪어왔다는 사실이다. 거대한 제국이 해체되고 새로운 나라들이 잇달아 탄생한 격변의 시기였다는 의미다.
국가의 해체는 역사적으로 볼 때 주로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오늘날에는 외부적 요인보다 내부적 요인으로 국가가 해체되는 경향이다. 국내 소요가 급작스러운 국경선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구 소련권에 몰아닥친 90년대의 대변혁이 바로 그 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세계화와 민주주의 확산에서 많은 전문가들은 그 해답을 찾고 있다. 민주화와 시장의 경제화와 함께 국가 주권에 대한 개념이 변하면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이라는 풀이다.
과거 통념으로 볼 때 한 국가는 영토와 그 영토를 통제할 수 있는 상비군을 기반으로 존재했다. 다른 말로 하면 현대적 개념의 국가는 하나의 통합된 경제권(국내 시장)과 동일 연장선상의 정치구조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가 진척되면서 국내 시장의 중요성이 무너지고 있다. 이와 함께 전통적 개념의 국가는 그 의미를 점차 상실하고 있다는 게 미래학자들의 지적이다. 이같이 한 체제가, 한 국가가 그 존재의 의의를 상실해 그 기반이 무너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 대탈출이다. 인간의 이동이다.
김정일 체제 균열의 시그널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 질 때까지 이미 350여만명의 동독주민이 서독으로 탈출했다. 1984년 한해에만 수만의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이주했다. 동독체제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989년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선이 개방되자 3주만에 4만여명의 동독주민이 헝가리 주재 서독 대사관으로 몰려들었다.
이런 경로로 수개월만에 10만여명이 탈출했다. 동독주민의 대대적 공간적 이동은 동독체제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은 결국 붕괴됐다. 인간의 대이동 앞에 장벽은 무너져 내린 것이다.
“북한 주민들은 공산당 기관지를 찢어 담배를 말아 핀다. 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다. 더 놀랄 일도 있다. 신문에 난 김일성과 김정일 사진 위에 누군가가 커다란 십자가를 놓았다. 나진-선봉 자유무역지역에는 반정부 포스터가 나붙었다. 학생들은 비밀리에 모여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2000년 9월께 전해진 북한 관련 첩보들이다.
그리고 2002년 3월. 한 사건이 발생했다. 25명의 탈북자가 북경의 스페인대사관으로 극적으로 망명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련의 사건은 한가지를 시사하고 있는 느낌이다. 김정일 체제는 ‘인민에 대한 장악력’을 상실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25명의 탈북자 망명은 극히 작은 일일 수도 있다. 탈북자 인구가 20여만을 헤아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어떤 예감을 주고 있다. 북한주민의 거대한 ‘엑소더스’(exodus)는 이미 시작됐고 이와 함께 김정일 체제의 균열은 급속도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다. 2002년 3월은 어쩌면 역사에 기록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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