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흥진 위원 오스카상 시상식 참관기
▶ ’색깔의 장벽’ 과감히 철폐...통곡 울려퍼진 감동의 시상식
제74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검은 아름다운 밤이었다. 40여년만에 자기 고향인 할리웃의 코닥극장에 돌아온 2001년도 아카데미 시상식은 사상 처음으로 두 흑인 남녀배우가 주연상을 탄 색깔의 장벽이 과감히 깨어진 역사적 행사로 기록될 것이다.
’훈련의 날’(Training Day)로 남자주연상을 받고 기자실에 들어선 덴젤 워싱턴은 "하룻밤에 두 새를 잡다니, 허"라며 스스로도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시상식장에서 상을 받고는 "하나님은 좋으시다. 하나님은 위대하다"고 오스카를 하늘로 쳐들고 감격해 했다. 워싱턴은 이날 특별상을 탄 시드니 포이티에가 1963년 ‘들에 핀 백합’으로 첫 주연상을 탄지 40년만에 주연상을 탄 흑인남우가 됐다. 워싱턴은 이어 "나는 지난 40년간 시드니 포이티에 뒤를 쫓아다녔는데 그와 같은 날 상을 주다니"라며 "그를 언제나 따르겠다" 다짐했다.
침착한 워싱턴과 달리 감격에 못 이겨 흐느껴 운 것은 ‘괴물의 잔치’(Monster’s Ball)로 여우주연상을 탄 베리. 베리는 러셀 크로우가 자기 이름을 발표한 뒤 무대에 올라 "오 마이 갓"을 연발하며 거의 통곡하다시피 해 기자실의 많은 기자들의 눈시울도 적시게 했다.
오스카 사상 주연상을 탄 첫 흑인여우라는 딱지를 영원히 달고 다니게 된 베리는 "나의 수상으로 이제 문이 열려 많은 얼굴도 없고 이름도 없는 유색여배우들에게도 기회가 생기게 됐다"고 색깔론을 강조했다. 그녀는 기자실에 들어서 소감을 묻는 질문에 "지금은 아무 말도 못하겠다. 1주일 후에나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 두 사람만큼이나 감격스러웠던 것은 시드니 포이티에(75)에 대한 특별상 시상이었다. 발코니에 마련된 특별석에 가족과 함께 앉아 있던 그가 무대에 등장하자 청중들은 일제히 기립, 장시간 박수로 이 할리웃의 역사적 인물을 치하했다.
포이티에는 "나는 이 상을 어려운 시기에 나를 앞서간 모든 흑인배우들을 기억하며 받겠다"면서 자기에게 역할을 준 많은 작고한 감독과 제작자들의 이름을 열거한 뒤 특히 팬들에게 사랑과 감사를 보낸다고 말해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그는 이어 기자실에 들어서 기자들로부터도 기립박수를 받았다.
첫 질문에 나선 몬트리올의 한 흑인 TV기자는 포이티에에게 "당신의 오스카를 한번 만져봐도 되겠느냐"고 물은 뒤 단상에 올라 포이티에의 오스카를 손에 쥐어 기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포이티에는 "많은 것이 변화했다고 보는가"라는 물음에 "분명히 변했다. 할리웃이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그건 불공정한 일"이라면서 "변화의 속도와 영속성에 대해 물을 수는 있지만 변한 것만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들은 포이티에, 워싱턴 및 베리에게 집중적으로 할리웃의 유색인종 특히 흑인차별에 관해 질문했다. 이에 대해 포이티에와 워싱턴은 상당히 외교적인 발언으로 대응했다. 특히 워싱턴은 자기는 할리웃의 인종차별에 대해 일일이 말하고 싶지 않다며 한 기자에게 "언론인인 당신이 앞장 서 인종차별 문제를 해결하라"고 조언했다.
반면 아직 경험이 미숙하다 할 베리(기자실에서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아카데미가 색맹이 되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러기를 바란다"고 답한 뒤 "피부색깔이 아니라 하는 일로 능력을 판단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면서 "내 수상이 유색여배우들의 유리천장을 깨버렸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두 남자배우와 달리 유색문제를 계속 언급한 베리는 백인 어머니를 지칭 "어머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겨 기자들의 웃음을 샀다.
한편 이날 또 다른 명예상을 받은 로버트 레드포드는 기자실에서 질문에 답하는 도중 워싱턴이 주연상 수상자로 발표되면서 기자들이 함성을 지르며 기립박수를 치자 말을 중단하고 기자들과 함께 TV로 워싱턴의 수상소감을 경청하기도 했다.
할리웃은 비백인들이 두각을 나타내기에 매우 힘든 곳이다. 통계에 따르면 1990년부터 2000년까지 전체 오스카 후보의 9%인 21명의 비백인(흑인, 라티노, 아시안 포함)만이 감독, 남녀 주조연배우 등 탑 5개 부문에서 후보에 올랐다. 이중 상을 탄 사람은 두 흑인인 우피 골드버그와 쿠바 구딩 주니어로 둘 다 조연상 수상.
올해 세명의 흑인 남녀배우가 주연상 후보(윌 스미스가 ‘알리’로)에 오르면서 미언론들은 아카데미의 유색인종 차별을 집중적으로 보도했었다. 이런 성토와 함께 포이티에에 대한 특별상 수상이 워싱턴과 베리의 수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과연 이 날의 검은 잔치가 앞으로도 할리웃서 계속 될지는 미지수다. 기자실에 들어서 얼굴에 만족의 미소를 지으며 감격해 하는 세 흑인배우를 보면서 마틴 루터 킹의 "나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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