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인 민주당이 ‘국민 경선’이라고 자랑한 대통령 예비후보 경선 대회의 첫 테입을 끊은 제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출사표를 던진 7명의 후보 중 선두주자로 예상된 이인제씨는 경쟁자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당했다. "97년 대선 당시 경선 결과에 승복한다고 서약까지 발표하고선 막상 패배하자 약속을 뒤집고 선거에 나선 것은 신의를 저버린 행동"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또 이씨가 이 당 저 당 기웃거리며 단물만 빨았다는 취지의 공격도 나왔다.
이씨는 당시 이회창 후보가 안고 있던 문제를 들이대며 반격에 나섰다. "아들 둘을 군대에 보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군 통수권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이 문제로 이회창 후보의 인기가 10% 선으로 떨어져 이러다간 안 되겠다싶어 독자 출마를 결심한 것이다."… 경선 불복에 대한 비난을 받을 때마다 이씨가 주장해 온 대응이다.
한데 이 날엔 아주 기묘한 예까지 들며 새로운 논리(?)를 개발했다. "젊은 가수 한 사람이 군 입대를 하지 않겠다고 해서 입국조차 금지 당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하물며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아들 둘 다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고 몸무게를 줄인 게 말이나 되느냐? 나를 공격한 분들은 그런 사람이 이 나라 통수권자가 돼도 좋다는 말인가?"
언뜻 논리 정연해 보이는 말이다. 한데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불현듯 몇 가지 생각이 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는 이씨가 문제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견강부회한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가 언급한 ‘젊은 가수’는 유승준군을 뜻함이 분명하다. 다이내믹한 춤과 노래로 스타덤에 올라 선 그에 대해 혹독한 비난이 쏟아진 진짜 이유는 ‘군대에 가지 않은’ 자체가 아니다.
거짓말로써 팬들을 속였다는 게 더 큰 이유였다. 여러 차례 군에 입대하겠다고 말해 놓고 뒤로는 미국 시민권을 신청했고 자격을 획득하자 이젠 한국 군대에는 갈 수 없게 됐다고 한, 말하자면 ‘공인으로서의 약속 파기’를 문제삼은 것이었다.
따라서 이씨가 유승준 경우를 예로 들 때 ‘그렇다면 그대는?’… 하는 반문이 불현듯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결국 자신의 언행에 대한 비난을 받아치기 위해 동원한 유승준 케이스가 오히려 자신의 ‘약속 불이행’을 상기시켜 주는 자충수였던 것이다. 게다가 현재 불운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한 젊은 스타를 지저분한 정치 논쟁에 끌어들인 것부터가 잘한 짓은 아니지 않은가.
두 번째 미치는 생각은 한국적 여론과 정서라는 잣대가 사뭇 감정적이요 편파적이며 때로는 그 눈금이 지극히 애매 모호하다는 점이다. 한번 냉정히 따져보자. 거짓말로 말하자면 경선에 지더라도 결코 독자출마를 않겠다고 국민 앞에 ‘서약’(書約)까지 했다가 막상 패배하자 자기 부대(민주계)를 이끌고 탈당해 대권에 나선 이인제씨가 나쁜가, 아니면 군대에 가겠다고 했다가 미 시민권을 따 어쩔 수 없이 ‘구두약속’을 어긴 유승준이 나쁜가. 백보 양보해서 "약속을 어긴 것은 어른이나 젊은이나 똑같다"고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약속 위반 뒤의 처리는 불공평하기 이를 데 없다. 유승준은 아예 한국 땅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중징계(?)를 받은 반면 이인제씨는 정치 지도자로서 화려한 입신의 길을 걷고 목하 집권당 대권 후보 자리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아니 어디 이인제씨뿐이랴. 한국 정치를 주물러 온 내로라 하는 인물들이 열이면 열 다 거짓말의 명수들이 아닌가. 정치에서 손을 떼고 대통령 선거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재출마하지 않겠다던 DJ(91년), 3당 통합 당시 노태우씨 등과 밀실에서 내각제에 도장을 찍어 놓고도 이를 헌신짝처럼 내던진 YS, DJ와 붙었다 헤어졌다 말 뒤집기에 이골난 JP, DJ를 "악당"으로 몰다가 총리자리를 주자 열렬한 DJ의 ‘용비어천가’를 읊고 있는 이한동씨… 면면들을 대자면 지면이 모자랄 지경이다. 거짓말의 농도와 크기와 심각성 등에서 보자면 이들의 허언은, 아직은 세상물정 모를 유승준의 ‘한 때 실언’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 정치 거물들의 약속 파기에 대해 한국민들은 아주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고 망각의 편안함에 안주하고 있다. 그런 틈을 타서 저들은 권력과 명예를 한껏 만끽들하고 있으니 이게 무슨 조화인가.
그렇다면 왜 이 지경이 됐는가. 거기엔 분명한 까닭이 있다. 우리 국민들의 덜 깬 의식 때문이다.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혹독한 비겁한 품성 때문이다. 나는 유승준이라는 젊은이를 만난 적도 그 와는 어떤 가족관계도 아니다. 또 그를 무작정 옹호할 생각도 없다. 그런고로 나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유승준을 징계하려거든 식언의 명수들인 정치지도자들부터 먼저 준엄히 심판하라. 그렇게도 못하면서 국내 여론과 정서라는 잣대로 한 젊은 교포 스타를 혹독히 비난한 국내 팬들과 미디어의 야누스적 행동은 옳지 않다. 아니 그보다 더 한심한 것은 그 여론에 밀려 유승준의 기본권을 제한한 당국의 조치는 졸렬하기 이를 데 없다. ‘입국불허’의 변인 즉, "풍속을 해쳐서…"라던가. 실로 웃기는 죄명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