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딸 아이가 있다. 만 15살이다. 나는 가끔 딸 아이 얼굴을 쳐다보며, “이 아이가 내 딸 맞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비단 나 뿐만이 아니고 비슷한 또래의 자녀를 가진 대부분의 부모들이 사춘기 자녀들과 전쟁을 치르느라 아우성이다.
대부분의 부모에게 있어 자녀의 말이나 행동에 반응하는 가장 원초적인 준거의 틀은 자신의 체험일 것이다. 물론 자녀 교육에 관한 책도 읽고, 미국이란 사회를 이해하고 배워보려는 나름대로의 시도도 해보지만, 문득문득 난 이렇지 않았는데...란 생각이 치솟을 때마다 부모들은 혼란스럽고 당혹해진다.
나는 7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른바 475 세대이다. 중고교 시절에는 입시의 중압감에 짓눌린 채 학창시절을 보냈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대학생이 선택된 사람이던 사회에 부담감을 느꼈다.
우리 세대는 합리주의로 일관된 서구식 교육을 받았지만, 우리가 딛고 서 있는 현실은 여전히 가부장적 질서에 의해 돌아가고 있었다. 부모 앞에서 부모의 뜻과 다른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일은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일은 곧장 말대꾸나 말대답으로 치부되었고, 이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짓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키우고 있는 우리의 아이들은 다르다. 대가족이 해체되어 버린 오늘날, 대다수의 부모들은 지난 날 자신을 옭아맸던 가부장적 질서를 자녀에게 요구하는 대신 친구같은 부모가 되고자 했다. 여기에 나를 중시하는 미국의 교육 환경도 큰 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우리 아이가 1학년 때 였던가, 학교에서 가져 온 교재에 쓰여 있던 글이 지금도 생각난다. 정확한 문귀는 잊어버렸지만 대충 “I like the way I walk/I like the way I speak/I like the way I dance... I like me.” 뭐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해서 호랑이 선생님의 구령 속에 앞으로 나란히부터 배웠던 내 눈에는 아이의 독창성과 자긍심을 키워주는 미국식 교육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바쳐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러나 미국을 20년 살고 난 지금, 만약 누군가가 나같은 생각을 이야기한다면 나는 아마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미국 신문의 상담 난에 단골로 등장하는 내용 중의 하나가 부모, 형제와의 의절에 관한 내용이다. 특히 형제(자매) 간의 갈등의 골은 왜 그리 깊은지... 나는 이런 내용을 접할 때마다 한국과 미국의 호칭 차이에 생각이 미친다.
미국에서는 형제끼리 서로 이름을 부른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손위 형제를 부를 때 형이나 누나 등으로 부른다. 형이나 누나는 상대방의 개체성이 아니라 상대방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호칭이다. 개체성을 존중하는 문화와, 관계를 존중하는 문화. 그 차이는 확연하다.
어느 가정을 막론하고 아이들이 부모에게 불평할 때 가장 많이 읊어대는 레파토리 중의 하나는 “그건 불공평해요”(It’s not fair)일 것이다. 나는 딸 아이에게 이 소리를 들을 때마다 미국학교 선생님들에게서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소셜 스킬이니 팀 워크니 하는 말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소셜 스킬이나 팀 워크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공평함이다. 공평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각 개인이 그 개체성을 훼손받지 않으려는 사회적 합의에서 출발한 것이다. 공평함은 시민사회에서 반드시 지켜져야 할 중요한 덕목임에 틀림없지만, 다른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한 적극적인 덕목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다.
결국 부모의 몫이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대가족이 해체되고, 많은 아이들이 외동 딸, 외동 아들로 자라나는 현실에서, 더우기 부모가 모두 밖에서 장시간 일하는 이민가정의 경우, 언제 어디에서 아이들에게 양보와 겸손을 가르친단 말인가? 부모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당당하고 그야말로 쭉쭉빵빵으로 자라나는 이곳의 아이들을 보면서 마냥 흐뭇할 수 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아이는 언제쯤 깨닫게 될까. 아이는 언제쯤 깨닫게 될까. 나는 딸 아이가 감사할 줄 알고, 다른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그것은 내가 특별히 착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래야만 딸 아이의 인생이 행복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은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 속에 있고, 그 관계에는 공평함 이상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딸아이는 언제쯤 깨닫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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