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1 이후, 미국의 뿌리깊은 가치관에 변화
▶ 프라이버시 중시하던 하이텍 업계가 앞장
프레즈노 공항에서 팜스프링스나 라스베가스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보안 검색대를 지나자마자 이전엔 보지 못했던 물건과 마주치게 된다. 킹콩의 립스틱이라면 어울릴 것 같은 6피트 높이의 커다란 알루미늄 원통이다. 이 장치는 승객이 접근하면 멈춰서라고 한 뒤 "앞을 보라"고 명령한다. 곧 이어 카메라가 여러 장의 사진을 찍고, 이 사진들은 곧바로 컴퓨터 데이터베이스에 입력되어 있는 테러리스트들의 사진과 대조된다. 일치하는 사진이 있으면 사이렌이 울리게 된다.
현재 프레즈노 요세미티 국제공항에서 시험 운영되고 있는 이 얼굴인식 시스템은 전국의 공항들이 설치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첨단 장치이다. 정부 관리들이 말했듯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테러리스트들을 철저하게 색출해내기 위해서다. 얼굴 인식은 9.11 테러공격 이후 첨단기술의 성격과 목적에 대한 폭넓은 전환이 미국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지난 20년간 첨단기술은 휴대형 전자수첩, 위성전화 등 보다 작고 저렴하면서 성능이 뛰어난 다양한 디지털 장치 등 개인의 삶을 보다 편리하게 하는 분산형 시스템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하지만 테러에 대한 공포는 통신망으로 연결된 편리함 대신 물리적 보안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분산형 기술에서 미국을 보다 안전하게 만들 수 있는 집중식 감시 체계를 추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시키고 있다. 첨단기술업계의 자금과 창의력이 이제는 일회용 감시카메라에서부터 악의를 지닌 뇌파를 감지해내는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불침번 기술을 개발하는 쪽으로 흘러들고 있다. 첨단기술은 공항이나 업무용 빌딩, 수퍼마켓, 대형 경기장, 또 컴퓨터 통신망이나 길거리에서 감시하고 통제하는데 이용될 것이지만 이는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안전을 위한 조치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질서는 소프트웨어나 서버의 개발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9.11 테러 이후 의회에서 통과된 테러방지 법안은 이메일이나 전화기록을 수사, 도청할 수 있는 FBI의 권한을 더욱 확대했고, 새로운 기술들은 이러한 작업이 더욱 더 신속하고 폭넓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이는 일반 시민들의 프라이버시 영역을 축소시켜 전통적으로 프라이버시를 중시해온 미국인들의 뿌리깊은 가치관과 정면충돌하게 될 것이다.
정보 프라이버시의 전문가인 하버드대 법대의 조나단 지트레인 교수는 "보안과 프라이버시는 늘 균형을 이루어왔지만 9.11 테러 공격 이후 이 등식에 변화가 생겼다"고 말한다. 대공황이나 진주만 기습 등 과거의 국가적 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부작용에 대한 충분한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정치적, 법적, 기술적 변화들이 빠르게 앞서나가고 있는 것이다. "당장 집이 불타고 있는데 위원회를 소집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지트레인 교수는 말한다.
이같은 변화의 선두에는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성공적이며 영향력 있는 두 명의 최고 경영자가 서 있다. 세계 2위의 소프트웨어 회사인 오라클의 래리 엘리슨 회장과 네트웍용 고성능 컴퓨터 제조업체인 선마이크로 시스템즈의 스캇 맥닐리 회장이 그들이다. 지난 10월 "절대적인 익명성은 절대적인 무책임을 낳는다"고 선언했던 맥닐리 회장은 "만약 당신이 비행기를 타면 난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고, 또 당신이 농약 살포 비행기를 대여하면 난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모두 첨단기술을 이용한 전국민 신분증제 도입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정부의 감시를 경멸해온 첨단기술업계 내부에서 나온 것이어서 더욱 주목되고 있다. 이 같은 입장은 또한 일반인들의 변화된 견해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한데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국민 신분증을 전체주의적 처사로 간주해온 미국인들의 입장도 지금은 상당히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국가안보국의 전 고문인 스튜어트 베이커는 "일반 국민으로서 우리는 약간의 프라이버시 침해를 안전과 바꿀 용의가 있다"고 이 변화를 설명한다.
9.11 테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일상생활에 깊숙이 침투해 있었던 첨단 감시장비들의 확산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데 미국 사회가 점점 더 투명한 사회로 변해가고 있는 것에 대해 익명성이 없는 세계가 도래할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도 없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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