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올림픽 열기가 한창이었을 때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와 텔리비전을 보다가 물었다. "미국과 한국이 시합하면 너는 어느 쪽을 응원할 거야?" 이렇게 묻는 내 말에 딸아이는 다소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미국"하고 대답했다.
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내심 내가 기대했던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이 땅의 주인으로 살아갈 딸아이가 아버지 나라 조국과 자기가 살아갈 조국의 갈림길에서 서슴없이 ‘살아갈 조국’을 택해 주기를 나는 바라고 있다.
김동성 선수가 스피드 스케이팅 시합을 하던 날 아내와 나는 한국 선수를 응원하고 있었다. 한미간의 대결이 있을 때 머리로는 미국을 응원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내 가슴은 번번이 한국을 응원하고 있었다. 김동성 선수가 1위로 골인을 하면서 우리가 질렀던 함성이 곧 분노로 변했을 때 옆에 있던 딸아이도 우리와 함께 흥분했다.
"나는 미국을 응원하지만, 이번 게임은 심판이 불공정해요. 금메달은 코리안이 땄어요."
미국이 이기느냐보다 공정하게 이겼느냐 중요하고, 누가 이기느냐보다 공정한 원칙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딸아이의 설명이었다. 분통이 터지면서도 나는 이 말에 상당한 위로를 얻었다.
김동성 선수가 금메달을 실격 당한 판정은 아직도 많은 한국인들 가슴에 분노와 억울함의 앙금으로 남아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인터넷을 통한 분노의 표출로 그치지 않고 정치 의식과 사회문화 의식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렇게 한국인들 감정이 곤두서 있는 때에 NBC-TV 투나잇 쇼의 제이 레노의 발언은 격해진 감정에 기름을 부었다. 레노의 경솔한 조크는 스피드 스케이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면서도 한국인 자존심에 가장 민감한 것 가운데 하나인 개고기와 연결시켰다는데서 더욱 분통을 터뜨리게 해주고 있다.
레노처럼 경망한 미국인들은 이번 김동성 사건이 한미간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한국인 가슴에 반미감정의 불길을 크게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감정이나 의식은 거창하고 논리적인 것보다는 작은 경험에 큰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체험 가운데 스포츠 감정은 엄청난 확산력과 번식력을 가지고 있다. 한국인들은 이번 오심을 올림픽 주최국의 텃세로 생각하고, 오노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한 음모에서 나온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 악의 축 발언으로 한국인들 심기가 날카로워지고 반미감정이 고조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은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코리안 아메리칸의 입지는 아주 묘하고 어려워지고 있다. 김동성 선수가 금메달을 강탈당했다고 발을 구르는 미주 한인들을 타인종 미국인들은 어떻게 볼까 하는 것이다. 심판이 잘못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되더라도 거기에 지나치게 흥분할 경우, 한국의 한인들과는 달리 미국의 한인들은 따가운 눈총을 받을 수가 있다.
당신들은 미국, 한국 가운데 어느 쪽이냐를 노골적으로 묻는 시선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코리안 아메리칸의 숙명이기도 하다. 지금처럼, 911테러 사건으로 미국이 애국주의와 국수주의 물결 속에 휩쓸려 갈 때에는 소수인종은 쉽게 감정분출의 표적이 될 수가 있다. 이럴 때일수록 코리안 아메리칸은 소수인종으로 이 나라 주인이 되는 슬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코리안이기 때문에 타인종들은 김동성 사건에 대한 우리의 의견을 묻는다. 한국의 코리안들이 흥분하고 반미감정으로 치닫는 것을 설명하는 데는 주저할 필요가 없지만, 미국의 코리안의 감정을 전하는데는 절제된 언어와 표정이 필요하다. 한국의 코리안들 분노가 엄청난 반미감정으로 확산될 수 있고, 이것이 미국과 한국간의 경제와 외교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경고로 이용할 수가 있다. 미국이 지나치게 오만한 강국주의와 애국주의로 나갈 때 미국이 추구하는 진정한 평화가 멀어질 수 있고, 세계 곳곳에 반미의 미움을 키울 수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코리안 아메리칸의 입장을 말 할 때는 일방적으로 한국 편을 들기보다는 미국과 한국의 중간자, 객관자 자리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태어난 2세들과 달리 우리는 미국과 한국의 경계선에서 감정적 월경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미국과 한국을 모두 사랑하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명예롭게 우승하기를 바라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어느 타인종이 나에게 당신은 미국과 한국 어느 쪽을 응원하느냐 하는 질문을 했을 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약한 쪽을 응원합니다."
kwangj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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