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이 선포된 후 한달여가 지난 9월 22일 반민족행위 처벌법이 공포되었고 10월 12일 반민특위가 구성되어 친일민족반역자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다. 광복된 조국을 처음부터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친일파를 척결함으로써 민족 정기를 바로잡는 일이 급선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친일세력은 이미 새 공화국의 요소 요소에 포진하고 있었다. 미군정이 사회질서 유지와 반공체제 수립을 위해 친일파를 대거 등용했고 대통령이 된 이승만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반민특위는 발족 다음 해인 1949년 1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 친일 자본가 박흥식을 체포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반민특위의 활동이 삼권분립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반대하면서 특위 활동에 협조를 거부했다.
때마침 그 해 4월 국회 프락치 사건이 터져 반민특위의 주도세력인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특위 활동이 유명무실해 지더니 6.25 후인 1951년 2월 「반민족행위 처벌법 등 폐지에 관한 법률」로 반민특위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의 지도층에는 친일 인사들이 대거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일제시대의 관리들이 정부 요직을 맡았고 일본경찰 출신이 치안을 담당했다. 일본군에서 장교로 복무한 사람들이 건군의 주역을 맡아 후에 군 수뇌부를 형성했다. 반공세력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부일협력자들이 모두 소탕된 북한의 사정과는 정반대 현상을 이루었다.
한국이 독립하면서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한 것은 한 마디로 잘못된 출발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친일 세력이 그대로 남아서 한국의 지배세력이 됨으로써 자주독립정신이 말살된 것은 물론 그 후 변화무쌍한 정치상황의 변천 속에서 변절의 악습을 남겼다.
친일파가 독재자의 주구노릇을 하다가 다시 세상이 바뀌자 민주적 정치인이 되는 변신의 명수들을 만들어 냈다.
그래서 반세기가 넘은 지금에도 친일파 논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얼마 전 진보적인 국회의원들이 모인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친일 반민족자의 명단을 발표했는데 당초 광복회가 작성한 명단에 국회의원들이 임의로 16명을 추가 발표하여 말썽이 되었다. 이 16명은 해방후 한국사회에서 지도적 역할을 한 인물들인데 대부분 일제 때 친일단체의 구성원으로 명단에 들어있었던 것이 친일 사유였다고 한다.
건국 직후 반민특위나 지금 국회의원 모임이나 국회의원들이 친일파를 척결해야 한다는 뜻은 마찬가지이겠으나 그 때와 지금은 반세기 이상의 시간적 간격 만큼이나 사정이 달라졌다.
당시 친일파 척결운동은 국회의 총의였으나 이번은 일부 의원들의 사적 모임에서 발표했고 당시 국회의원들은 친일파의 언동이나 행각을 직접 본 사람들이 많았고 친일파로 지목하는데 필요한 증거도 쉽게 찾을 수 있었으나 지금은 역사적 사실을 발굴하여 친일 행적을 밝힐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특히 임의 추가된 16명은 일제 때나 해방 후나 한국사회의 명사들이었으므로 친일단체에 이름이 들어 있었다는 것만으로는 친일로 못 박기는 부족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명사들의 이름은 자의에 상관없이 동원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표면상으로는 일제에 협력을 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반일사상을 가지고 항일활동을 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일제의 공립학교 교사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반일사상과 한국역사를 가르친 사람이나 일경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독립군에 정보를 주거나 피신시킨 사람, 또는 일제를 이용해 돈을 벌었지만 그 돈을 독립운동에 쓴 사람은 친일파가 아니라 독립투사로 대접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친일파를 가려내는 일은 피상적이나 감정적으로 다룰 일이 아닐 것이다. 물건을 도둑질하여 법정에 선 형사범도 증거에 의해 형을 받는 시대에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 찍는 친일행위를 속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이제 반세기가 지난 역사를 뒤적여야 하는 작업으로 사학자의 영역이 되어 버렸다. 특히 현실적 이해관계에 얽혀있는 국회의원들이 심판을 맡는다면 그 공정성은 훼손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기영(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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