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다.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점령했을 때 정작 미국이 우려한 것은 사담 후세인의 탱크가 쿠웨이트에서 머물지 않고 사우디까지 진격하는 것이었다. 회교 최대의 성지 메카와 메디나가 있고 세계 석유 매장량의 4분의1을 보유하고 있는 사우디가 사담의 손에 떨어질 경우 세계 경제는 그의 손아귀에서 춤추고 사담은 회교권 최강의 지도자로 떠오를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걸프전 승리 후 미군을 사우디에 주둔시킨 것도 어떤 일이 있어도 사우디만은 사담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결의의 표시였다.
중동에서 미국과 그나마 가깝던 미국과 사우디와의 관계가 9·11 테러 이후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 3,000명의 무고한 미국 시민을 죽이고 기뻐 날뛰던 오사마 빈 라덴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4대의 비행기를 납치한 테러범 19명 중 15명이 사우디 출신이다. 중동 테러조직에 가장 많은 돈을 대고 있는 곳이 사우디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미국인들의 눈이 급속히 차가워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사우디 하면 오일 달러로 돈을 물 쓰듯 하는 부국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실상과 다르다. 기름 값이 배럴당 40달러 가까이 하던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는 그랬다. 중동은 물론 동남아 노동자들이 몰려가 막노동을 하고 한국 재벌도 각종 공사를 해주며 돈을 벌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 옛날 얘기다. 80년대 중반 이후 계속돼 온 유가 하락으로 지난 20년간 1인당 국민소득은 2만달러에서 7,000달러로 줄어들었다. 반면 가난한 집에 애만 많다고 인구는 700만에서 2,000만으로 늘어났다. 세월이 좋던 시절 흥청망청 놀기만 해 현대 경제를 이끌어갈 전문 인력은 없고 엄한 율법주의를 고집하는 와하비파 계열의 회교 문제를 전공한 학생만 쏟아져 나온다.
거리는 수백만의 실업자와 반실업자가 넘쳐나고 농촌에는 아프리카와 비슷한 수준의 가난에 찌든 아이들이 우글댄다. 9·11 테러를 저지른 15명의 사우디인이 바로 이곳 출신이다. 사우디 왕실과 서구에 대한 적의에 가득 찬 오사마의 메시지가 먹혀드는 것도 이해가 된다.
많은 전문가들은 사우디의 현 상황이 혁명 일보직전 상태라고 보고 있다. 밑에서부터의 불만의 소리는 무섭도록 번져나가고 있는데 보수파의 입김 때문에 개혁은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수십만의 외국 운전사를 데려다 쓰면서 "여성이 어떻게 운전을 하느냐"는 수구파의 반발로 여성들에게 운전 면허증을 주자는 안은 아직도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사우디에서 내란이 일어날 경우 그 여파는 전 세계에 미칠 것이다. 오사마가 사우디에서의 미군 축출을 테러 목표의 하나로 잡은 것도 미군을 몰아낸 후 그 여세를 몰아 사우디 왕가를 전복하고 광대한 기름 밭을 손에 쥐겠다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사우디 최대 석유 수출항인 라스 타누라 한 곳에서만 하루 500만배럴의 석유가 수출된다. 미국에 대한 복수와 세계 경제의 교란을 노리는 테러리스트들이 타겟으로 노릴 만한 곳이다.
자체 생산은 600만배럴에 못 미치는 미국은 총 소비량의 7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1978년 지미 카터 대통령 때부터 "한 방울도 더 석유를 수입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의존도는 오히려 2배로 늘어났다. 수입원은 중동만이 아니라 세계 각처지만 유가를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곳은 사우디다. 단 시일 내 초과 수요를 충당할 여유 분이 있는 곳은 여기뿐이기 때문이다.
경기 침체와 함께 한동안 하락세를 보이던 기름 값이 7주째 오르고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지금도 비싸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인플레를 감안한 실질 가격은 지난 20년 동안 거의 오르지 않은 상태다. 중동에서의 이변이 없어도 올해 말 경기가 회복된다면 지금보다 더 오를 가능성이 높다.
’악의 축’ 발언에 가려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부시의 국정 연설에는 에너지 독립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이 여러 번 나온다. 부시를 비롯 체니 부통령 등 부시 행정부내 고위 관리 중에는 오일맨 출신이 많다.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석유산업 발전에 전력을 기울일 것은 자명하다. 환경론자의 반발을 무릅쓰고 북극권을 개발하기로 한 것이나 석유산업에 대한 규제를 풀고 세제 혜택을 주는 입법을 추진하고 있는 것 등이 모두 그 예다.
국방산업 지원과 금융 자율화를 강조한 레이건 집권기간에 국방과 금융산업이 번창하고 테크놀로지 개발이 미 경쟁력 강화의 관건임을 강조한 클린턴 재임 기간에 하이텍이 융성했던 것처럼 부시 행정부 하에서 가장 덕을 볼 업체는 석유산업이라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라크와 이란의 10배의 부존량을 가진 사우디 화약고에 불이 붙는다면 그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기름 값이 올라간다고 불평하기 전 석유 회사 주식을 사두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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