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할머니 댁에서 올라가 봤던 다락방은 별천지였다. 할머니가 연지 곤지 찍고 시집올 때 받으셨던 함 안에는 비단 옷이랑, 오색의 반지고리, 옥비녀와 노리개가 참 곱게도 놓여 있었다.
우리 집 다락방도 재미있기는 마찬가지. 멋쟁이 엄마가 처녀 때 신던 빨간색 구두를 보고 있으면 똑똑 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다. 깃 좁은 아빠의 회색 양복에서는 좀약 냄새가 코를 찌를 듯 났었지. 막내 동생이 덮었던 조각 이불, 이제는 자주 사용하지 않지만 버리기는 아까워 쌓아놓은 물건들도 온통 세상이 신비롭기만 하던 어린 아이의 눈에는 경이 그 자체였고 이 모두를 품고 있는 다락방은 ‘마법의 성’이었다.
다락방 보물 상자를 열어보던 즐거운 추억을 안고 있는 스티브 김(44·주노 인테리어 대표)·신자 (44·주부)부부는 시간만 나면 패사디나, 샌타모니카, 웨스트 할리웃, 컬버 시티 등 LA 시내에 들어서는 골동품 시장을 이 잡듯 뒤지며 추억을 사냥한다.
최근 이 부부에게는 주말 나들이를 나설 골동품 시장이 하나 더 늘었다. 매달 첫 주 일요일 젊음의 거리 웨스트우드에 들어서는 장은 다른 곳보다 그 규모가 작다는 것이 오히려 매력적이다. 때로 너무 선택할 것이 많다는 것은 한가로운 주말을 기대하는 마음에 부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충분히 시간을 갖고 여유 있게 골동품들을 들여다보고 손으로 만져보며 그 물건의 주인은 어떤 이였을까 생각에 잠겨보기도 한다.
황학동 고물상을 연상시키는 골동품 시장에 들어서면 아주 먼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된다. 중후함이 느껴지는 청동 기마 상, 칙칙 판 긁히는 소리와 함께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처럼 모찰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선율이 흘러나올 것 같은 축음기, 일본 부호가 팔았나 생각되는 기모노는 나비 부인 쵸쵸 상이 핑커톤 대령과 지낸 첫날 밤 입었던 것인 양, 그 무늬가 화려하다.
검은머리 채에 타오르는 눈매를 가진 안달루시아 여인들이 얼굴을 가리고 있다가 맘에 드는 남자를 발견하면 잠시 내리고 눈짓을 보냈을 법한 깃털 달린 부채, 어우동이 들었던 것 같은 대나무 살 기름종이 양산도 눈길을 끈다.
그물 망사가 얼굴을 가리는 모자, 어깨까지 올라오는 장갑에 뾰족 구두를 신는다면 피카소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도라 마처럼 보이지 않을까. 할머니의 보석 상자에서 꺼내온 것 같은 앤티크 보석은 티파니 쇼윈도우의 다이아몬드보다 더욱 영롱한 빛을 발하며 비밀스런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할아버지의 회중 시계와 곰방대, 끝이 동그랗게 말리는 금테 안경, 깃털 달린 모자와 지팡이. 고스란히 잘 차려입는다면 세기말 유럽의 지식인이 따로 없을 것이다.
세익스피어와 찰스 디킨스, 로버트 브라우닝 등 세계적 문호들의 명작을 아름다운 가죽 커버로 씌운 고서들. 꼭 읽어야 맛일까. 그냥 테이블 위에 놓아두기만 해도 커피 향이 더욱 짙어질 것 같다.
벼룩 시장에서 스티브 김 씨가 좋아하는 품목은 골동품 카메라, 타이프라이터를 비롯한 문구류와 다리미. 모양이 예뻐 하나 둘 구입하다 보니 꽤 숫자가 많아졌다. 최근에는 선반을 직접 짜 이 물건들을 올려놓고 바라보길 즐긴다.
요리하기를 좋아하는 그는 또 주방기구 수집에도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은제 나이프와 포크, 프랑스 리모지 메이커의 접시와 크리스털 와인 잔들. 어떻게 사용하고 관리했기에 이처럼 생채기 하나 없이 백 년도 넘는 세월을 견뎌내고 오늘 이 자리에 진열될 수 있었던 걸까.
그가 벼룩 시장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풍요로움 때문일 게다. 쇼핑몰에 간다면 스웨터 하나도 사오지 못할 돈으로 양손 가득한 보따리에 한 달은 두고두고 즐거워할 물건들을 사올 수 있는 벼룩 시장은 세상의 경제 법칙을 따르지 않아 더욱 좋다.
골동품에서 묻어 나오는 냄새가 퀴퀴하긴 하지만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데는 오히려 도움을 준다. 전통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손때 뭍은 물건들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 새 주말 한나절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타임 머신 없이 떠난 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두 부부의 마음 바구니를 행복으로 가득 채운다.
♠ LA 인근에 골동품 시장, 벼룩 시장이 들어서는 장소와 일정은 다음과 같다.
▲Westwood Village Antique & Collectible Street Fair : 매달 첫 일요일, 오전 9시-오후 3시까지 열린다. 다음 행사는 3월 3일과 4월 7일. 입장료는 따로 없다. 주소 Broxton Ave. Westwood (Wilshire 2블록 북쪽, Westwood Bl. 한 블록 서쪽에 위치한다. Broxston 선상 Weyburn 한 블록 남쪽 주차장에 1시간 무료 주차 가능.) 문의 전화 (310) 824-6365. 웹사이트,www.westwood-village.org.
▲Culver City Antique & Collectible Indoor Show : 매달 셋째 일요일 오전 9시-오후 3시까지 열린다. 다음 행사는 3월 17일과 4월 21일. 입장료 4달러. 주소 4117 Overland Ae. (Culver Bl.와 만나는 곳)
▲Santa Monica Airport Antique & Collectible Outdoor Market : 매달 넷째, 다섯째 일요일 오전 6시-3시까지 열린다. 다음 행사는 2월 24일, 3월 1일, 3월 24일, 4월 28일. 오전 6시-8시까지의 입장료는 6달러, 이후부터는 4달러. 행사 장소는 Santa Monica Airport (10번 프리웨이에서 Bundy로 내려 Airport Ave.와 만나는 지점.)
▲Super Sunday Antique Sale : 4월 7일 일요일 오전 8시-오후 3시까지 열린다. 입장료는 4달러 50. 12세 이하 어린이는 무료. 20에이커가 넘는 전시장에 다양한 품목을 갖추고 낮은 가격에 판매한다. Good Housekeeping 잡지에서 꼽은 미 전국 최고의 골동품 쇼. 행사 장소는 Long Beach Veterans Stadium (405프리웨이를 타고 Lakewood Bl. North 출구로 나와 우회전, Conant St. 코너에 있다.) 문의 전화 (323) 655-5703. 웹사이트, www.LongBeachAntiqueMarket.com
▲The Melrose Trading Post : 매주 일요일 오전 9시-오후 5시까지 열린다. West Coast Peddler 등 신문에 나온 쿠폰을 오려 가면 입장료가 1달러이다. 행사 장소는 Fairfax와 Melrose 코너 Fairfax High School 운동장. 주변에 무료 주차공간이 많다. New Times와 Los Angeles Magazine이 꼽은 LA 최고의 벼룩 시장. 품목과 종류가 상당히 다양하다.
글 박지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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