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도’의 금기를 깬 미국의 대기업들이 연이어 홍역을 치르고 있다.
욱일승천의 기세를 보이던 에너지 거래기업 엔론에 이어 통신업계의 자이언트 글로벌 크로싱의 간부들이 줄줄이 의회의 소환장을 받았고 시내전화 회사인 퀘스트 커뮤니케이션스 역시 변칙 회계로 증권거래위원회의 조사대상에 올랐다. ‘절제의 도’를 지키지 못해 화를 자초한 3사들 가운데 ‘도방’격은 단연 엔론이다.
국내 재계 서열 7위의 공룡기업인 엔론이 정경유착 의혹을 불러일으키며 무너져 내리자 연방의회는 9개 소관 상임위와 소위원회별로 청문회를 열어 진상조사에 착수했고, 법무부와 상무부, 증권거래위원회까지 내사작업을 벌이고 있다. 말 그대로 미 정가가 온통 엔론사태에 매달리고 있는 셈이다.
엔론은 1985년 케네스 레이에 의해 천연개스업체로 출범한 뒤 불과 15년만에 세계 최대의 에너지 거래업체로 ‘광속 성장’을 이룬 초우량 기업이었다.
한국에서나 가능할 법한 ‘압축성장’의 신화를 일궈낸 엔론의 초대 CEO 레이는 침례교 목사의 아들로 찢어지게 가난한 성장기를 보냈다. 칠면조를 살 돈이 없어 추수감사절을 썰렁하게 보낸 적도 있었다니 그가 경제적으로 얼마나 참담한 환경에서 자랐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그의 궁기 든 인생은 미주리대학을 거쳐 휴스턴대에서 경제학박사학위를 따내고 사업에 투신하면서 급속히 반전한다. 연방정부의 에너지거래 감독관으로 근무하다 엔론을 설립한 레이는 자신의 회사를 ‘포천’지 선정 국내 500대 기업 가운데 서열 7위의 거대 기업으로 끌어올렸다.
기업을 일구는 과정에서 전방위 로비를 펼친 레이는 워싱턴 정계에 ‘뒷배’를 보아줄 방대한 네트웍을 구축했다. 엔론은 이 대목에서 "장사꾼과 정치인의 사이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아야 한다"는 ‘상도’의 원칙을 어겼다. 옛말 치고 틀린 것 없다더니 실력자들을 주머니 속에 넣으려던 그의 시도는 일이 꼬이자 기어이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그러나 엔론의 몰락은 정치권과의 뒷거래에 따른 부작용이라기보다 지나치게 공격적인 경영철학의 산물이었다. 레이는 보수적인 기업운영방식에 강한 경멸감을 갖고 있었다. 늘 ‘월드 클래스’를 강조한 그의 지론은 "남의 방식을 답습하면 잘해야 2등"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공격적 경영철학을 신봉하는 인물들로 주변을 채웠다.
야심만만한 명문대학의 수재들을 스카웃해 친위부대를 구축한 그는 인사고과를 통해 직원의 20%를 끊임없이 물갈이했다. 그의 경영방침을 따르지 않으면 목을 보존하기 힘든 살벌한 분위기였다. 반면 살아남은 자들에겐 엄청난 ‘당근’이 수시로 제공됐다. 엔론의 몰락을 부채질한 변칙회계가 가능했던 것도 ‘당근’ 때문이었다.
엔론은 2000년 한해동안 미국 굴지의 회계법인 아더 앤더슨에게 감사비용으로 2,500만달러를 지불했으나 컨설팅 수수료로 2,700만달러를 내주었다. 아더 앤더슨으로서는 봉을 잡은 셈이었고, 거대 고객을 놓치지 않기 위해 ‘변칙’을 눈감아 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에론은 "재물과 사람의 부림은 공정하기가 저울추 같아야 한다"는 상계의 규율을 어겼고 "장사꾼 최고의 적은 눈앞의 이익만을 쫓는 소탐"임을 망각했다.
하지만 변칙회계로 손실을 감추고 이익을 부풀려 주가를 띄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장부에 기재되지 않은 뒷거래로 회사가 회복 불능의 타격을 입자 엔론의 간부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던 자사주식을 처분, 막대한 시세차익을 챙겼다. 그러나 은퇴연금 401(k)의 60%를 자사주로 채운 2만명의 직원들은 주식처분 동결조치로 주가 폭락을 손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결국 12억달러의 손해를 입었다.
엔론의 몰락은 변칙경영의 한계를 보여준 교훈으로 남겠지만 죄 없는 직원들이 지불한 대가는 가혹한 것이었다. "장사는 이윤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라는 드라마 ‘상도’의 주제를 엔론의 경영진은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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