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에는 반미감정이 들끓고 있다. 크게는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시 대통령의 발언에서부터, 작게는 가수 유승준 파동까지 한국인들의 심사를 건드리고 있다.
사실 반미감정이 갑작스레 불거진 현상은 아니다. 최근 일부 대학생들과 시민단체들이 부시 대통령의 방한 반대시위를 벌인다는 소식이지만, 70년대 카터 전 미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서도 대학생들의 반대시위가 있었다.
그 때와 지금의 차이는 세월이 좋아진 탓에 이러한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의 수가 늘었다는 것뿐이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주한 미군 철수나 미국 대통령 방한 반대를 내걸고 데모하는 학생들은 ‘빨갱이’거나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철부지’들로 매도됐었다. 물론 신문이나 방송에는 단 한 줄도 보도되지 못했고, 설사 보도되었다 하더라도 대다수 국민들로부터 심정적인 지원을 얻어내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오늘날 미국을 성토하는 한국인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한국인들의 자신감이 그만큼 늘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의 의식이, 한국의 국력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데, 아무리 조국을 떠나 살고 있는 몸이지만 반갑지 않을 리 없다.
그러나 최근의 한국 소식들을 접하다 보면 아무래도 "이게 아닌데" 싶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내가 미국에 살다보니 은연중 미국물이 들어서도, 아니면 우리 민족이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민족이 될까 염려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람들이 미국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감정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국은 사랑의 대상이거나 증오의 대상일 뿐 객관적인 성찰이나 극복의 대상으로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한 쪽에서는 미국의 패권주의를 성토하고, 다른 쪽에서는 자녀들을 앞다투어 미국에 유학 보낸다. 세계 최대의 스타 벅스 매장이 있는 곳이 서울이고, 강남의 한 미국 프랜차이즈 식당 사장은 기록적인 매상고로 본사 회장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던가. 이러한 현상은 물론 계층 간의 차이로 설명될 수도 있겠지만, 한 개인 안에도 미국에 대한 애증의 감정은 뒤섞여 있다. 한국 국민들과 한국 정부가 집단 히스테리에 가까운 과잉반응을 보인 유승준 파동이 그 한 예라고 생각한다.
사랑과 미움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미국을 미워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미국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말이기도 하다. 미국은 그동안 우리에게 피를 나눈 혈맹이었으며, 우리의 자유와 안보를 지켜준 큰 형님이었다.
그러나 국가와 국가 간에 자국의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관계가 과연 가능한 것일까. 미국은 전세계의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자국의 이해 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일 뿐이다.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다.
미국을 움직여나가는 두 가지 대표적인 축은 아마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일 것이다. 민주주의란 한 마디로 이해가 상충되는 그룹들이 타협과 절충을 통해 상생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고, 이는 힘(돈)의 논리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그 틀을 유지해 나가기 위한 필수적인 제어 장치일 것이다.
미국은 이 두 가지 축이 맞물려 움직여 나간다. 테러에 대한 전쟁 선포로 전세계를 대결 국면으로 몰아가고 있는 부시 대통령은 에너지 산업과 군수산업 등 대기업들을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그만큼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부시뿐 아니라 전세계의 어느 정치 지도자들도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그는 불경기와 엔론 사태 등 국내의 정치적 위기 상황을 타개해야 할 입장에 있다.
부시의 정책을 지지하거나 옹호해서가 아니다. 다만 감정적으로 흥분하기 이전에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는 냉철한 자세가 아쉬워서다. 그리고 모든 것을 미국 탓, 부시 탓으로만 돌리는 것도 바른 태도는 아니다. 대한민국도 자국의 이해득실에 따라 모든 조치를 취할 권리가 있는 주권국가다.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을 상대로 하는 게임은 분명 불공정 게임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섣부른 감정적 대응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 반미냐, 친미냐 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이제 벗어날 때가 되었다.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성숙된 시민의식이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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