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惡)이란 무엇인가’-. 정의를 내리기가 만만치 않다. 상대적 개념이고 주관이 개입될 소지가 많아서다. 그러나 보편적 개념으로는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어떤 현상이든, 의지든 인간에 해로운 것은 모두 악이다’라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을 이루는 국가로 지적하고 나섰다. 테러리즘을 지원하는 국가이고 전체주의 국가라는 이유에서다.
부시의 선언이 나오자 미언론들은 다투어 ‘악의 축’을 이루는 이 세나라에 조명을 맞추었다. "이라크는 히틀러 스타일의 파쇼체제다. 이란은 고르바초프 등장 이전의 소련과 비교된다. 북한은 ‘원조 스탈린주의’보다도 더 엄혹한 스탈린주의 체제다." 하나 같이 인간을 억압하는 체제요, 전체주의체제라는 말이다.
전체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반(反)하는 제도다. 그러므로 ‘전체주의는 악’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이는 이제 자명한 공리다. 지난 20세기 한 세기에 걸친 기나긴 전체주의와의 전쟁을 통해 그 체제가 지닌 악마적 요소를 인류는 처절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론은 그렇다고 치고 그러면 왜 이제와서 부시 행정부는 새삼스레 이란, 이라크,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나섰을까.
미·소 냉전이 한창이던 지난 70년대 초 냉전은 다름 아닌 ‘전갈과 독거미의 싸움’이란 논리가 대두됐다.
소련의 동구권 지배나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 지배는 본질에 있어 다를 게 없다는 내용이다. 냉전 사학자 루이스 핼리의 지적으로 이후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도덕적 판단은 배제시킨채 동서냉전을 바라보는 시각이 유행을 탔었다.
1983년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규정하고 나섰다. 가치관의 관점에서 본 선언으로 상당한 파장을 불러왔었다. 냉전이 끝난후 그러나 레이건의 선언은 옳았음이 판명된다. 구 소련권 주민들도 냉전을 선과 악의 대결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한,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본성에 반한 소련 공산주의가 ‘악의 화신’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나서 10년. 테러전쟁이 발발했다. 그리고 나서 또 4개월후 부시는 새로운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북한 등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는 전체주의와의 전쟁은 끝난 게 아니고 새로 시작됐다는 선언이다.
그 선언은 20세기의 전쟁이 세속적 전체주의(나치와 공산주의)와의 전쟁이었다면 21세기의 전쟁은 종교적 전체주의와의 전쟁이 될 것이라는 전망에 근거한 것이다. 회교근본주의 광신주의가 바로 종교적 전체주의다. 그리고 그 종교적 전체주의국가들이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사태를 더 이상 방관 않겠다는 선언이다.
이 ‘악의 축’을 이루는 나라들을 선제 공격할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다분히 풍기는 부시 독트린은 ‘국내용’의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정국을 전시 체제로 이끌 때 ‘차기도 보장된다’는 계산에서다.
그보다는 그러나 9.11사태 이후의 새로운 국제 안보환경을 면밀히 검토, 미국을 중심으로 국제질서를 조성하겠다는 다부진 의지의 발로로 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방주의적 정책 선언일 수도 있다.
북한문제도 그런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국제 안보환경이 바뀐 이상 테러전쟁이라는 글로벌한 차원에서 ‘한반도 프로젝트’에 접근하겠다는 이야기다. ‘악의 축’의 일원으로 북한을 본다는 게 그 바로 그 의미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북한은 물론 햇볕정책 자체에도 대한 부시 행정부의 불신의 시각이 깔려 있는 인상이다.
말하자면 한국정부의 북한 포용노력을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지만 남북간한의 공조가 새로운 국제 안보환경에 바람직 하지 못한 영향을 미친다면 이는 미국으로서 좌시할 수 없는 입장을 내보이고 또 세계적 차원의 정책수단을 동원하겠다는 입장이다.
미국의 입장은 북한문제에 대해 은연중 또 다른 암묵적 요구를 하고 있는 것으로도 비쳐진다.
도덕적 판단, 가치관의 판단도 겻들여야 한다는 요구 같다. 남북문제를 ‘전갈과 독거미의 대치 상황’이 아닌 ‘자유주의와 전체주의의 대치 상황’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문 같다.
’악의 축’과 ‘햇볕정책’. ‘W 부시와 DJ’-. 어쩐지 묘한 상극관계에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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