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시 대통령의 국정연설이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부시 독트린’으로 불리는 이번 연설의 의미와 미국이 과연 이들 나라를 상대로 군사행동을 벌일 것인지 여부를 조망해 본다.
성난 미국은 "악의 축"을 동강내기 위한 칼을 뺄 것인가 말 것인가. 지난 주 부시의 국정 연설은 의례적인 연례행사가 아니라 21세기 벽두 미국의 입지를 확인하고 부시 집권기간에 대외정책의 기본 방향을 정한 의미심장한 발언이라는 게 정책 분석가들의 결론이다.
우선 미국 대통령이 국정 연설에서 특정 국가를 이름까지 거명하며 "악의 축"이라는 극한 용어를 사용해 비난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테러와의 전쟁이 이번 연설의 주 내용이지만 이들 국가를 지탄한 부분을 유심히 읽어보면 테러 얘기는 빠지고 대량 살상무기를 생산하는 나라라는 부분이 강조돼 있다.
다시 말해 테러 지원 여부와는 관계없이 미국을 위협할 수 있는 대량 살상무기 제조 국가는 미국의 적이며 이들이 무기를 사용하기 전 미국은 이들을 사전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을 밝힌 것이 ‘부시 독트린’이라 불리는 국정 연설의 요체다.
부시 발언이 나오자 북한과 이란, 이라크 등은 당장 미국을 "사탄" "호전광" "피에 굶주린 흡혈귀" 등으로 부르며 반격에 나섰다. 유럽 등 우방국가에서도 못마땅한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미국 내 여론은 확고하게 부시 편이다.
보수파 논객들은 물론이고 중도나 진보 진영에서도 "자국민을 굶겨 죽이는 북한, 테러무기 수출을 일삼는 이란, 자국민에게 독개스를 사용한 이라크"를 지탄한 부시 발언을 사실이라며 그의 입장을 전폭 지지하고 있다.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당시 40여명의 민주당 상원의원이 무력 사용에 반대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번 ‘악의 축’ 국가 응징에는 민주당 내에서도 고어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거의 반대가 없다.
부시 발언이 국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자 국무부 일각에서는 "그것이 군사행동 개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진화작업에 나서고 있으나 그렇게까지 강한 발언을 한 이상 어떤 형태로든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란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곤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은 미국은 목표 달성을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것"이라고 말해 부시 발언을 뒷받침했으며 부시 자신도 레이건의 "악의 제국" 발언 이후 최대 규모의 국방예산 증액을 요청, 경고가 허튼 소리가 아님을 과시했다.
부시의 국정 연설은 그동안 부시 행정부 안에서 벌어져온 강경대 온건파의 싸움에서 강경파가 확실히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하다. 파월 국무장관은 매파의 기수 딕 체니 부통령과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수차례 정책 토론을 벌였으나 모두 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비둘기파의 온상이던 국무부 고위 관리들은 국정연설 내용을 사전에 알지 못했으며 발표 내용을 듣고 경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악의 축’으로 지목 당한 세나라는 공식적인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미사일이란 고리로 묶여 있다. 이란은 북한의 미사일 개발 자금을 지원해 주고 개발된 미사일을 받았으며 이라크도 북한의 미사일 장비를 사들였다. 이들 세나라가 핵 개발에 관심이 있으며 생화학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북한이 미국의 신경을 가장 거스르는 부분이 미사일 개발이다. 북한은 9·11 테러 이전은 물론 이후에도 미사일 개발 작업을 멈추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가속화하고 있다는 것이 미국의 판단이다. 이미 대포동 2는 4,000~6,000km의 비행거리를 갖고 있는데 이를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것. 부시대 전략방위 체제가 필요한 이유로 내건 것 중 하나가 북한의 미사일 위협이었다. 미국은 이미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을 자체 생산, 네바다 등 군사기지에서 요격 실험을 하고 있는데 현 명중률은 30% 선이라는 게 한 관계자의 말이다.
이들 세나라 중 군사공격 가능성이 가장 큰 나라는 이라크다. 북부 쿠르드족과 남쪽 시아파 반군 등 국내 저항세력이 있고 걸프전 경험이 있어 군사행동을 하기가 가장 쉽다. 하늘에서 미군이 때리고 땅에서 이들이 이라크군을 괴멸시키는 아프가니스탄식 작전을 쓰면 국민의 지지가 없는 후세인 정권은 쉽게 무너질 것이라는 게 매파들의 생각이다. 국외에 후세인을 대체할 수 있는 이라크 국민회의라는 반정부 단체도 조직돼 있다. 부시 행정부는 이들을 냉대하던 종전 태도를 바꿔 이들에 대한 지원을 재개했다.
이번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군사시설이나 화생방시설에 대한 폭격이 아니라 정권 전복이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후세인이 그동안 이런 시설들을 병원이나 학교 근처에 숨겨놨기 때문에 공습만으로는 효과를 거둘 수 없고 또 후세인이 남아 있는 한 대량 살상무기 생산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지 않는 해결책은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랍권과 유럽은 이라크에 대한 공격에 반대하고 있지만 전쟁이 속전속결로 끝나기만 한다면 아무도 후세인의 몰락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국내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이란은 좀 더 시간을 두고 보자는 것이 부시 행정부의 입장이다. 이란의 실권을 쥐고 있는 회교 성직자들은 나이가 많고 점점 더 국민의 지지를 잃고 있으므로 시간은 미국 편이라는 계산이다. 최근 벌어진 축구경기를 보러 나왔던 관중 수만 명이 친미 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레자 팔레비 전 국왕의 아들이 이란 민주화의 상징이며 젊은 세대의 우상이 되는 희한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미국이 군사행동을 취하기 가장 껄끄러운 상대는 북한이다. 북한에 대한 군사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한국 정부의 동의가 없이는 불가능한데 수백 기의 북한 미사일이 서울을 겨냥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이를 허락할 한국 지도자는 없다. 일단 군사행동이 시작되면 김정일 정권은 무너지겠지만 한국이 입는 피해가 엄청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부시의 대북 발언은 군사행동 개시를 알리는 신호라기보다는 고집부리지 말고 협상 테이블에 나오라는 경고성이 짙은 것으로 풀이된다.
부시는 이 달 19일 한국을 방문, 대북 정책에 관한 양국 이견을 조율할 것이다. 부시가 대북 강경노선을 고집할 경우 한국의 햇볕정책은 사실상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다. 꿈쩍 않는 북한과 강경으로 치닫는 미국 사이에 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한국 입장이다. 처음부터 대가 없이 퍼주는 것을 우선으로 한 대북 외교를 펴 온 한국 정부로서는 이제 와서 북한한테 본전 돌려 달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더 줄 수도 없는 곤경에 빠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 체면도 좀 살려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가 바로 허버드 주한 미 대사로부터 "체면은 동양적 개념이며 미국에는 그런 사고방식이 없다"고 반박 당했다.
한국한테 돈만 받고 그 동안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해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게 부시 행정부의 대 북한관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외교통상부 장관을 갈아대는 것을 능사로 아는 한국 정부가 이런 미국 측 시각을 어떻게 바꿔 타협점을 찾아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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