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국민의 뜻에 역행해 종신 대통령이 되려하자 국민의 ‘분노 지수’가 위험수위에 올랐었다. 4·19 혁명으로 장면정부가 들어서고 민주화의 기대가 움트면서 ‘분노 지수’가 내려가는 듯했으나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소장이 "조속한 민정이양"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장기집권을 획책하자 다시 치솟았다.
무력으로 권력을 잡은 것도 모자라 "평화의 댐을 건설해 국가의 안위를 지키겠다"고 떠들어대던 전두환 정권은 과장된 북한위협으로 국민을 우롱해 ‘분노 지수’를 높였고, 노태우 정권은 "깨끗한 정부"를 공약으로 쿠데타의 주역이란 멍에를 벗으려 했으나 수천억원에 달하는 비자금 사건으로 ‘분노 지수’의 상승에 불을 지폈다.
"선진국처럼 잘 살게 해주겠다"고 호언하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이다 뭐다 해서 요란한 잔치를 벌였던 김영삼 정권은 국제통화기금(IMF)에 애타게 구걸하는 ‘쪽박 국가’를 남겼으니 ‘분노 지수’가 내려갈 리 만무하다. ‘국민의 정부’를 부르짖던 김대중 정권도 식은 죽 먹듯 일구이언을 해왔다. 정경분리 원칙을 내세우면서도, 자금난에 허덕이는 현대의 금강산 관광사업에 혈세를 털어 넣겠다고 한 것은 그 일례이다.
대권을 잡아 보겠다는 정치인들도 다르지 않다. 당내 경선에서 패하자 "결과에 승복하겠다"던 발언을 "불복"으로 뒤집었으면서도 지금껏 자신이 적임자라고 강변하는 이인제씨, "대쪽같이, 법대로"를 트레이드 마크인양 뽐내면서도 아들 군대 면제 부분에서는 통쾌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이회창씨도 ‘분노 지수’ 올리기에 한 몫했다.
국민을 울화통 터지게 할 일은 이뿐이 아니다. 대형사건이 터질 때마다 "엄정 수사"를 뇌까리던 검찰은 눈치보기에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고 국회의원들은 머리를 90도로 숙이며 "뽑아만 주시면…"하던 유권자와의 맹약을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입 씻기가 일쑤다. "한푼도 흩트리지 않겠다"던 공무원과 악덕기업주는 천문학적 액수의 공적자금으로 자기 배불리기에 혈안이 돼 있고, "정론으로 탁류를 정화하겠다"던 언론도 기업과의 더러운 유착에서 자유롭지 않으니 눈을 씻고 봐도 ‘분노 지수’를 누그러뜨릴 만한 거리가 도통 보이지 않는 현실이다.
힘께나 쓰는 사람이면 한 입으로 두 말하는 게 통례가 돼버렸고 국민은 일구이언에 대한 반감을 차곡차곡 쌓고 있다. 이렇듯 한국사회는 언제든지 터져 버릴 분노의 도가니다. 정치인, 검사, 공무원, 경제인 등등 손봐주고 싶은 사람은 수두룩하지만 정작 이들을 혼내주기엔 역부족인 게 개개인이다. 그러니 "만만한 표적이 나타나기만 하면…"하며 울분을 모아 두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던 중 미주 출신 인기가수 유승준이 걸려들었다. 그의 미시민권 취득결정이 분노의 분출구가 된 셈이다. 신나는 유승준의 노래와 댄스 솜씨에 매료돼 무대 아래서 연신 두 발을 동동 구르고 두 손을 흔들며 환호하던 팬들은 "당당히 입대하겠다던 말을 번복해 배신감을 느낀다"며 펄쩍뛰었다. 시민들은 "고약하다"고 분개했으며 당국은 "국익을 저해할 수 있다"며 인천공항에서 "입국금지"라는 철퇴를 휘둘렀다. 국민의 분노에 편승한 당국의 조치는 감성적 대응의 전형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친인척이 연루된 스캔들 정국을 돌파할 속셈인지 모르겠지만 합당한 규정과 절차에 따라 법을 집행하기보다 국민의 분노에 편승해 조잡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맹비난은 가하더라도 입국자체를 막을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외쳐대던 ‘세계화’ 구호를 무색케 하는 ‘반 세계화’ 행정이다.
물론 유승준이 이번 파문에 원인제공을 한 것은 사실이다. 수많은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인기 연예인이면 입대 문제가 민감한 사안이란 점을 알았어야 했다. 선택의 자유만큼이나 말을 바꾼 것에 대한 책임도 본인의 몫이다. 후유증을 고려해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썼어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국사회에 넘실대는 분노의 수위를, 표적만 잡으면 휩쓸어버릴 기세로 오르는 ‘분노 지수’를 헤아리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한국에서 활동하거나 활동해 보려는 미주한인들이 가장 먼저 익혀야 할 것은 노래도 아니고 춤도 아니다. 다름 아닌 ‘분노 지수 읽기’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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