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 인터뷰
▶ ’한미 개척 40년사’ 펴낸 ‘피장’교회 전재린 원로목사
개척자로서 한평생을 살아온 전재린 목사(82·피닉스 한인장로교회 원로목사)가 한국과 미국에서의 목회 40년의 경험을 진솔하게 털어놓은 ‘한미 개척 40년사’라는 제목의 책을 내놓았다.
총 349페이지에 제1부 ‘한국에서의 25년’, 제2부 ‘미국에서의 15년’, 제3부 ‘말씀의 은혜’ 등의 순으로 정리된 이 책은 일제 말엽 전통적인 유교 가문의 박해 속에서 하나님을 영접, 8·15해방을 맞은 후 성령과 거듭남의 사건, 6·25사변과 분단의 아픔, 목사가 되기까지 겪은 많은 교회와 사람들과 사건들, 신학을 하고 목사가 돼 개척목회를 했던 시절, 그리고 아들(전태진)의 초청으로 애리조나 피닉스에 정착한 뒤에도 개척자로서의 길을 걷다가 은퇴한 그의 전 생애가 가감없이 담겨져 있다.
9남매를 둔 가장으로서 한곳에서의 안주를 거부하고 개척자로서의 고단한 삶을 한평생 고집해온 그의 생애는 이 시대의 ‘교훈’이 될만하다.
-먼저 축하드립니다. 책을 내게 된 동기나 목적이 있으셨을 텐데.
▲전재린 원로목사(이하 ▲표로 생략)=어느덧 제가 61명의 자녀손손의 조상이 됐습니다. 시간은 자꾸 가는데 더 늦기 전에 후손들에게 신앙의 뿌리를 심어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체험담 위주로 쓰고 또 쓰며 정리를 해오다 보니 한 10년이 걸렸고 그 과정에서 후배들을 위한 참고도 됐으면 좋겠다는 욕심도 갖게 됐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어떤 이론도 아니고 또 누구의 말을 전달한 것도 아닌 저 자신의 이야기며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같이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후배들에게는 개척정신의 목회상을 부족하나마 나름대로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개척정신에 대해서 말씀을…
▲개척자란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며 기존교회도 외형에 상관치 않고 부임해 개척정신으로 목회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 교회가 목사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나로 인해 하나님의 교회가 조금이라도 흠집이 난다면 두말없이 사면해야 하는 것이 개척자가 가져야 할 목회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곧 사도 바울의 개척정신이기도 합니다.
-후배 개척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으시다면.
▲개척자가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자신의 의지대로 앞장서서 성령운동, 진리운동을 이끌어가려 하지말고 개척자로서 받은 사명대로 순종하다 보면 성령께서 은밀하게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개척자는 인간적 소망과 축복, 그리고 성공을 전제로 해서는 안됩니다. 돈과 명예에 집착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사명을 받았을 때 물불을 가리지 않는 투신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거기에 한가지 더 강조한다면 철저한 희생정신이 따라야 합니다.
-돈과 명예, 인간적 소망을 멀리하려다 보면 부양가족이 있을 경우 그로 인한 생활의 궁핍은 물론이고 그밖에 많은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을 텐데.
▲저는 지금까지 여러 교회를 개척(한국 3, 미국 3)하고 건축했지만 정작 저와 아내가 함께 있을 집 한 칸이 없습니다. (다음의 내용은 그의 저서에서 일부 간추려 옮긴 것임.) ‘1946년 8월 용궁에서 10리쯤 떨어진 산북과 현리교회에서 자원봉사 할 때 수고비로 받은 보릿자루에 구멍이 나 있는 줄 모르고 자전거에 싣고 집에 와보니 자루가 많이 축이 나 있었다. 속이 상한 아내는 아이들에게 길거리에 뿌려진 낱알들을 주워오라고 했을 정도로 생활이 정말 궁핍했었다. 단 하루라도 새벽기도를 거르지 않으려고 아들과 딸들의 학교 졸업식에 한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미국에서) ‘나는 한때 인간적 소망을 가졌었던 적이 있다. 아들집에서 두 내외가 몸을 계속 의탁하기도 그래서 하나님께 떼를 쓴 적이 있다. 그러나 나의 한평생 하나님은 단 한번도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목회 40년과 그동안 한국과 미국에서 개척한 교회는…
▲1936년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어느 날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평양 영월 북면의 연당리교회 부흥집회에 참석, 은혜를 받으면서 저의 본격적인 신앙생활이 시작됐습니다. 그 후 평신도 부흥사경회(대구 밀양삼문동교회)를 이끌었고, 1948년 경안노회 전도사로 성락교회에 부임했으며, 51년 고려신학교에 입학, 55년 졸업(제9회)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52년 신양장로교회, 점촌 중앙장로교회를 개척했고, 1956년 목사안수를 받은 후 다문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 후 아들(전태진)의 초청으로 이곳에 와 같은 해 1974년 현재의 피닉스 한인장로교회, 1981년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템피 한인장로교회, 1987년 오리건 삼일교회를 각각 개척했습니다. 은퇴는 1989년 피닉스 한인장로교회에서 했으며 1992년 원로목사가 됐습니다. 돌이켜보면 저의 목회 40년은 곧 개척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민교회에서 어려웠던 기억은…
▲영어를 몰라서 늘 밀렸습니다. 교인들의 이동이 잦았지만 저는 교인들이 조건 좋은 데로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토끼와 거북이에 비교한다면 저는 거북이였으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가 영주권을 받은지 얼마 안돼 이민국에 저에 대한 투서가 있어 그로 인해 한 2년 동안 애를 먹었었습니다. 뒤에 사실무근에 모함인 것이 밝혀지며 이민국에서 그동안 보류해 왔던 저의 가족초청 문제를 전격적으로 처리해 주는 바람에 큰딸(분석)과 둘째딸(분희) 그리고 셋째딸(분식) 가족이 함께 이곳에 오게 됐습니다.
-개척자로서의 지난 삶에 후회 같은 건 없으신지요.
▲개척자의 말년은 세상적으로 볼 때 실패자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가진 것과 보이는 것으로 평가하기 때문이지요. 나이가 어려서는 혈기를 다스리지 못해 떼를 쓰기도 했었지만 이젠 하나님의 넓으신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저를 목사로 세우셨고, 저에게 허락하신 9남매가 무병무탈하게 성장, 사회에서 쓸모 있게 하셨고 자손 모두를 아무런 상함 없이 보호해 주신 데다가 남은 여생 마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보낼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 등 영육간에 수많은 축복을 주셨습니다.
-끝으로 가족 상황을…
▲1920년 경북 예천군 용궁에서 출생, 19세 때 현재의 아내(전양석)와 결혼해 3남6녀를 두었으며 손자와 손녀, 그리고 증손 등 4대에 걸쳐 모두 61명이 됐습니다. 자녀 가운데 다섯째딸(은숙) 가족(사위 최병수 화공학 박사)을 제외하고 모두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큰사위 방종국 장로(피닉스 한인장로교회), 큰아들 전태진 장로(전 한인회장, 평통위원 등 역임)와 며느리 전해옥 권사(피닉스 한인장로교회), 둘째딸(분희)과 사위 김영신 목사(한국 울산교회), 셋째딸(분식)과 사위 문성원 장로(템피장로교회), 넷째딸(은혜)과 사위 황명조 장로(시애틀 거주), 둘째아들 전동진 목사(뉴저지 체리힐장로교회)와 며느리 전은숙 사모, 셋째 아들 전남진 장로(록히드사 엔지니어)와 며느리 전혜진 집사, 그리고 여섯째딸(은향)과 사위 윤원환 목사(템피사도교회)입니다. 특히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둘째아들이 저의 대를 이어 목사가 된 것과 막내사위가 ‘개척자의 대’를 이었다는 점입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