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 거창한 신조를 내세우고 시작하던 다른 해와는 달리 올해는 딱 한가지만을 새해신조로 정했다.
새술은 새푸대에 - 문득 생각난 것이었다. 옛날 대학시절 클럽활동하며 간부일동이 다 물러나면서 내세우던, 일종의 변명이자 격려같은, 그때만해도 낯설었던 언구가 철썩 들이붙어버렸던 것이다.얼핏보기엔 케케묵고 창의력도 없는 시시한 모토같지만 나 자신이나 우리가족에겐 엄청난 과제다. 우리는 이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남들은 쇼핑하느라 파티하느라 정신없는 12월 한달내내 매주말마다 하루종일 일했다. 그뿐인가. 평일에도 일과가 대충 끝나면 틈틈히 일했다. 일사불란 - 뭐 그럴 정도였다.
그 과제란? 우리가족 일동의 대청소 - 청소라기보단 차라리 심신양면의 구닥다리 숙청작전이었다. 십오년간 살던 이집에서 옛날의 태도와 때를 벗고 새해를 밝고 화목하게 시작하자고 나는 가족일동에게 애걸도 하고 뇌물도 먹이고(매일같이 별식으로) 해서, 남들은 봄에나 한다는 봄청소를 동지섣달 그믐에 설친 것이다. 그 좋은 봄날에 무슨 잡동사니 청소는? 해가며 말이다.
무에 이리도 많은가. 나는 버릴 것 남줄 것을 분리해가면서 생각에 잠겼다. 엊그제같은 십오년 - 어찌보면 기나긴 세월이기도하다. 이 세월의 짐은 몸서리나도록 엄청나게 무겁다. 그 짐을 홀홀히 벗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집만 혼자 이 오랜 세월의 짐을 벗을 게 아니라, 우리자신의 마음으로부터도 차곡차곡 쌓인 짐과 때국물을 씻어내고 산뜻하게 새해를 맞도록 결심한 것이다. 한겹씩, 두겹씩...
생각해보자. 우리는 서로 얼마나 사소한 일에도 불만이 많고 다투기 잘하는가. 가족간에 부부간에 친구간에 이웃간에 우리는 얼마나 나를 먼저 앞세우고 남에게 상처를 자주 입히는가, 욕을 하는가. 야속한 일, 억울한 일, 어이없는 일도 많았겠지. 일에는 관심없고 남이 잘돼는 거 배아파서 헐뜻기일수인 직장동료, 필요한 때만 은근해지는 친구라는 사람들, 불툭하면 언성높이는 안하무인격 이웃사람, 이렇다할 이유도 없이 툭터지는 가족간의 불화... 이 모든 어두운 이미지를 우리의 기억에서 마음에서 깡그리 싸보내고 햇살 가득한 일요일 아침같은 이미지들로 새단장하기로 했다.
나는 눈감고 생각해보았다. 기억의 앨범을 들쳐보았다.
어린 시절 동산에 올라 늘상 그리던 그 푸른 고향바다와 하늘,
그 위로 날라가는 희디힌 뭉게구름,
매미소리 찌르는 숲속의 여름,
봄비내려 안개 자욱한 대학시절 캠퍼스의 심심한 연초록의 언덕,
갓난 우리아가를 품안에 안고 처음으로 집으로 데려오던 날 샛노란 수선화 가득히 만발한 언덕 위의 우리집은 행복도 하였지...
내가 한국에 갈적마다 바쁜 일 다 제쳐놓고 한자리에 모여서 주거니받거니 희희닥거리며 반겨주는 옛날 학교 동무들,
한여름 싱그러운 나무 그늘 아래 둘이 나란히 풀밭에 누워 책보며 문득 나를 보며 우리 꼬마가 하던 말 - 엄마, 우린 참 행복하지?
우리의 인생에는 정말 아름다운 일, 감격스런 순간이 얼마나 많으냐. 크기도 하고 사사롭기도 하고, 길기도 하고 눈 깜짝할 사이기도 하지만 행복이란 여기저기 아무데나 널려 있기만 한데. 그런데도 우리는 절대로 행복하지 않다. 불만투성이다. 우린 모두 바보같이 멍청이 세월의 잡동사니 짐에 눌려 허우대지 않는가. 동지 그믐날밤 우리식구 일동은 서로의 노력을 격려하며 축하하며 감사하며 신단장한 벽장 안에 들어가 감격의 순간(?)을 맛보았다. 우리 딸넴이는 저도 한몫 했다는 자부심해 큰소리 한마디 하고싶었다. 남편은 이때다! 하고 엉뚱하기 짝이없는 희망사항을 슬그머니 내밀었다.
- 엄마, 내봄방학 때 가기로 한 하와이 여행 예약 다 됐어요?
- 여보, 여기 와서 이 사진 좀봐! 42피트 케치, 네폭 돛단배야. 저 기막힌 선체의 곡선을 보라구.
- 야, 빨간 테두른 돛이 너무 멋있는데요!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한시의 지체도 없이, 추호의 죄책감도 없이 떠들어댔다. 새롭고 멋진 이미지를 한꾸러미 만들 때가 됐으니까. 새술은 새푸대에 담아야 하니까. 새해는 재밌고 행복한 한해가 틀림없겠다. 아니 꼭 그렇게 만들어야겠다. 여러분도 시도해보시라. 단지 온식구 총출동 대청소를 먼저 하실 것. 만족을 보장합니다.
박정현 가정주부 전산시스템 경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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