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눈앞 장애물은 쿠바, 그러나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진정한 암초는 미국. 미국전 패배(1대2, 한국의 미국전 통산전적 5승2무2패·비공식 평가전 포함)의 한숨을 거둘 겨를도 없이 또 한편의 승부가 하루앞으로 다가왔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한국축구대표팀은 골드컵 B조에 남겨진 1장뿐인 8강행 티켓을 놓고 23일 오후9시 패사디나 로즈보울 구장에서 미지의 쿠바를 상대로 자존심을 건 일전을 펼친다.
호랑이가 토끼를 잡을 때에도 최선을 다한다는 경구를 팽개친 것은 아니지만 골드컵 우승과 월드컵 16강을 노리는 히딩크사단이 월드컵은 고사하고 골드컵에도 참가 자체에 의의를 두는 쿠바에까지 신경을 곤두세운다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 따라서 히딩크사단은 이유불문 쿠바를 격파하고 8강에 올라 ‘그후’를 도모한다는 골드컵 플랜은 그대로 유지하되 보다 궁극적인 목표, 월드컵 16강 그랜드 플랜을 착착 실천에 옮기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첫 단추는 뭐니 해도 ‘미국축구 바로알기’. 히딩크 감독을 비롯한 한국팀 코칭스탭은 지난해 12월 서귀포에서의 송년매치와 이번 골드컵 매치를 토대로 오는 6월10일 대구에서의 월드컵 맞대결 승리를 위한 묘수풀이에 여념이 없다.
패사디나 전투의 가장 큰 전리품은 US사커의 단조로운 득점루트를 새삼 확인한 것. 미국은 서귀포전과 마찬가지로 미드필드 싸움에서 별로 힘을 쓰지 못한 채 안전한 후방에서 볼을 돌리다 한두방에 최전방 공격수에게 연결, 기습득점을 노린다는 점이 이번에도 드러났다.
전반 34분에 터진 미국의 선제골도 하프라인 너머 자기진영에서 볼을 돌리며 멈칫멈칫 기회를 엿보다 최진철-유상철-김태영으로 이어지는 한국 수비라인이 전진하자 곧바로 그뒤 빈 공간으로 찔러준 뒤 랜던 다나븐이 파고들어 부랴부랴 달려나간 골키퍼 이운재를 빤히 쳐다보며 키넘이 토스로 엮어낸 것이었다.
여기서 드러난 한국의 허점은 미국의 배후침투 속셈에 좀체 속지 않던 수비진이 그 순간 왼쪽 터치라인쪽을 타고 ‘담을 넘으려는 위장침투 공격수’에 한순간 눈이 팔린데다 오프사이드 함정에 걸릴 줄 알고 느슨하게 대응, ‘한템포 늦게 시동을 걸어 한템포 빠르게’ 가운데 빈틈을 헤집은 다나븐을 놓친 것.
경기종료 30초를 남기고 내준 결승골 역시 최종 저격수만 다를 뿐 빚어내는 과정은 비슷했다. 하프라인 바로 지나 한국진영 오른쪽에서 볼을 잡은 다나븐은 한국 수비라인의 무게중심도 오른쪽으로 잔뜩 쏠린 것을 확인하자 즉각 왼쪽 ‘문전 공터’로 로빙 패스를 띄웠고 교체멤버 다마커스 비슬리가 쏜살같이 달려가 벌칙구역 선상에서 왼발로 강슛, 크로스바를 맞고 골네트로 빨려드는 결승골을 만들었다.
연말연초 2연속 힘겨루기에도 불구하고 찜찜하게 남아있는 가장 큰 고민은 미국축구 라인업 완결판이 여전히 안개속에 갇혀있고 따라서 미국축구의 진면목을 속속들이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불과 16세에 MLS 데뷔했다 독일 분데스리가의 맛까지 본 ‘19세 미소년’ 다나븐은 1골 1도움에다 후반11분 순식간에 최진철의 방어벽을 에둘러 문전으로 대시하려다 최진철의 거친 파울과 퇴장을 유도하는 등 미국축구의 새 활력소로 자리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얘기가 나오면 "그때 뽑힐지 안뽑힐지도 모르는데…"라며 자신없는 표정을 짓는 상황이고 보면, 게다가 브루스 아레나 감독 또한 팀 구성원의 ‘큰 변화’를 예고해온 점에 비춰 ‘엊그제 본 US사커’는 ‘또다시 볼 US사커’가 아닌 게 분명하다.
우선 플레이메이커로 공수를 조율하는 클라디오 레이나(잉글랜드 선더랜드) 골잡이 겸 미드필더로 지난해 US사커MVP 트로피를 차지한 어니 스튜어트(네덜란드 NAC브래다) 문전돌파와 슈팅능력이 뛰어난 포워드 조-맥스 무어(잉글랜드 블랙번) 등 유럽무대에서도 잘나가는 주력부대가 거의 소집되지 않았다. 이들이 합류할 경우 패사디나 전투에서 한국에 거저 내주다시피한 미드필드 점유율이 한층 올라갈 건 뻔하고 따라서 단조로운 공격패턴은 다갈래로 전개될 수 있다.
’히디크 사람들’은 레이나 등 유럽파의 경기장면을 담은 비디오를 입수, 볼을 가진 상황은 물론 볼을 갖지 않은 상황에서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체크하며 특징분석과 봉쇄작전 수립에 골몰하고 있으나 ‘주력 용사들이 모두 모인 최근 경기’ 비디오가 드물어 대책역시 확정판을 내지 못하고 있다.
미국선수들이 체격은 의외로 자잘하면서도 체력은 의외로 강인하다는 점 또한 걸리는 대목. 서귀포전 후반 미국이 다소 앞선 듯한 경기를 펼친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미국은 조직력은 엉성했지만 후반 종료휘슬이 울릴 때까지 페이스의 둔화를 거의 눈치챌 수 없는 움직임을 보여줬다. 히딩크감독이 눈앞의 경기일정에 아랑곳없이 태극전사들에게 체력강화를 닥달하는 것은 월드컵 큰승부에서 1승1무 이상 따내야 할 대상으로 꼽아놓은 미국과 폴란드가 적어도 체력만은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팀이란 판단에서다.
다만 미국 수비라인 중앙을 담당하는 34세 노장 제프 에이거스의 순간스피드가 뒤처지고 제공권에서 취약점을 보여 2대1패스 또는 에이거스의 뒤쪽을 막바로 훔치는 공간침투 방식으로 중앙돌파를 시도하거나, 줄기찬 측면공격으로 수비전선을 넓게 퍼지게 한 뒤 센터링에 이은 헤딩슛 또는 센터링을 예상하고 짜여진 수비대형을 역이용해 안쪽으로 꺾어들어가는 냉·온탕식 공격을 퍼부을 경우, 득점길목을 비교적 수월하게 뚫을 수 있다는 ‘희망어린 단죄법’도 도출됐다.
선발 첫 출장의 부담을 떨쳐버리고 ‘기민하면서도 의도가 담긴 움직임’을 자주 보여준 차두리가 경험을 좀더 쌓으면 엄청난 파괴력을 갖게 되리란 진단과 왼쪽날개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옮긴 이천수가 날이 갈수록 새 포지션을 잘 소화해내고 있다는 평가또한 히딩크사단의 향후 공격전술 운용에 숨통을 트여주는 요소다.
한편 미국이 21일 쿠바를 *대*로 꺾고 2연승으로 8강행을 확정지음에 따라 한국은 쿠바와 무승부만 거둬도 골드실차에서 앞서 조2위로 준준결승에 진출하는 계단으로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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