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강탈행위에 다름이 아니다" "미국판 연줄 자본주의(Crony Capitalism)다" "시스템의 붕괴다" "백악관은 떨고 있고 언론은 의심하고 있다" 미기업 사상 최대 파산으로 불리는 엔론사 파산과 관련해 미국의 언론들이 쏟아내고 있는 말들이다.
"고위 공직자 주식거래 정밀 추적" "벤처비리 특별감사" "부패척결, 말로는 안 된다" "소인배를 물리쳐라" 끊임없는 비리 폭로로 검찰총장이 물러나고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성명을 하는 잇단 사건의 와중에서 한국 신문을 요란하게 장식한 제목들이다.
이름하여 ‘엔론 사태’다. ‘게이트 정국’이다. 워싱턴과 서울이라는 동떨어진 곳에서 따로 따로 모종의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그 사건의 외양이 너무 비슷하다. 정치권 사람의 이름이 거론된다. 타이밍도 그렇다. 너무나도 묘한 우연의 일치다.
이 두 사건은 그러면 본질적으로 같은 성격의 사건일까. 그 대답은 미국식으로 표현해 ‘예스이자 노우’인 것 같다.
"공직자에 의한 권력의 남용은 끝이 없다. 부패는 개발도상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부패는 전 세계적 문제다." 국제 투명성기구의 피터 아이겐 회장의 말이다. 2001년 6월의 시점에서 한 말이다.
그 해 1월 워싱턴의 한 논객은 이런 전망을 했다. "21세기 들어 가장 중요한 전쟁은 부패와의 전쟁이 될 것이다." 그리고 4개월 후 그는 이렇게 확언했다. "오늘날 전 세계적인 가장 중요한 정치적 움직임은 부패와의 싸움이다."
공산체제가 물러난 후 구 소련권 전체에 번진 부패상, IMF 사태를 맞아 그 정경유착의 구조를 드러낸 아시아의 경제 시스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선진국에 만연한 금융 비리. 이런 90년대의 상황을 토대로 나온 전망이었다.
이 예언이 적중한 것일까. 예언대로라면 게이트 정국과 엔론 사태는 ‘부패의 세계화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면에서 두 사건은 동일선상에 있다. 그리고 정치권이 개입된 사건일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도 그 성격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질에 있어 전혀 다른 사건이다. 엔론 사태는 단적으로 이야기 해 ‘기업 파워’ 남용의 결과로 보여져서다. 이 사건의 개요는 이렇게 정돈될 수 있다. "상황이 심각하다. 사주와 경영진은 그 사실을 교묘히 은폐하면서 자사 주식에 투자한 2만명의 종업원에게는 주식 매각을 막으면서 자신들은 소유 주식을 내다 팔아 수억달러를 챙겼다."
지금까지 드러난 상황을 종합하면 정치권은 이번 사태에 부수적 존재에 불과하다. 엔론측이 정치헌금을 해온 건 사실이지만 정치권이 엔론의 도산 사태를 막기 위해 도움을 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감독기관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가 불거진 심각한 문제점이다. 이번 사태는 그러므로 ‘정경유착’이라기보다는 ‘월스트릿과 기업의 유착관계’ 성격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경제 시대를 맞아 ‘코퍼릿 아메리카’(Corporate America)가 그 비대해진 파워를 오만하게 휘두르다가 제풀에 주저앉게 된 게 진상에 가깝다. 오만한 신경제 논리에 따른 무분별한 기업확장이 빚은 비극이다. 어찌 보면 그 신경제 논리에 정치권이 놀아난 셈이다.
"백악관 비서진이 구속된다. 연방 법무장관이 잇달아 쫓겨난다. CIA, FBI 등의 고위 당국자들이 구속된다. IRS도 관련됐다는 소문이다. 불똥은 연방 상·하의원에게도 튈 기세다. 대통령은 결국 대 국민담화를 발표한다…."
한국의 게이트 정국을 미국에 대입시키면 바로 이런 형국이다. 미국이라는 풍토에서 전혀 불가능한 시나리오다. 확고한 법치전통에 비추어 볼 때 이 이런 상황은 도저히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게이트 정국은 엔론 사태와 확연히 다르다.
게이트 정국은 공권력 남용이 가져온 결과다. 정치권이, 다른 말로 하면 권력이 비리의 주체다. 기업은 엔론 사태와는 정반대로 부수적 존재다. 정치논리, 그것도 끼리끼리 주의의 정치논리만 판치다가 빚어진 사태다. 그 종착지는 총체적 부패와 법치의 붕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 원인은 고비용의 정치구조에 있다고 본다. 막대한 정치자금이 필요한 정치판은 그 자체가 마(魔)의 골짜기다. 이 골짜기에 한번 빠져들면 도저히 헤어날 수 없다. 마치 거대한 블랙홀 마냥 엄청난 흡인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시 대선 정국이다. 그런데 그 출발점부터가 불안해 보인다. 오직 돈이 말해주는 선거. 정치권 전체가 블랙홀에 빠져들지 않을까 하는 기우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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