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호황을 상징하는 대기업 하나를 들라면 어디일까. 많은 사람들이 첫 손에 엔론을 꼽을 것이다. 한 때 자산 총액 600억 달러로 미 7대 기업에 랭킹 됐던 엔론은 초고속 성장 뿐 아니라 봉급은 물론 직원 복지가 경쟁사보다 현격히 뛰어나 ‘미국인들이 가장 일하고 싶은 기업’으로 여러 차례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던 회사가 작년 말 ‘미 기업 사상 최대 파산’이란 오명과 함께 문을 닫았다. 한 때 90달러에 달하던 주식은 25센트까지 떨어졌다 조금 회복돼 65센트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다. 증권 분석가와 회사 간부 말만 믿고 은퇴연금 대부분을 자사 주식에 투자했던 수천 명의 엔론사 직원들은 일자리는 물론 퇴직금 전액을 날리게 됐다.
1985년 자그마한 개스 공급 회사로 출발한 엔론은 경제학 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켄 레이가 경영의 고삐를 잡으며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유전을 개발하고 개스 파이프를 건설해 정부가 정한 가격에 개스를 파는 것보다 개스 공급자와 고객을 연결시켜주는 것이 더 돈벌이가 된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엔론은 개스 회사가 아니라 에너지 투기회사로 변모해갔다.
안전하고 보수적인 경영이 특색인 유틸리티 사의 위험한 탈바꿈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내던 사람들도 한 동안 이 회사가 연 매출 1,000억 달러가 넘는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자 팬으로 돌변, ‘신 경제와 구 경제를 결합한 걸작품’이라는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래를 지향한 미국 기업의 모델’로 칭송되던 엔론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작년 가을 발표된 회계 보고에 회사 자산이 아무 설명 없이 12억 달러나 줄어든 것이다.
그 후 "회사의 앞날이 어느 때보다 밝다"고 직원들에게 떠들던 그 순간 회사 간부들은 주식을 팔아 거액을 챙겼으며 이 회사의 감사를 맡은 미 5대 회계 법인의 하나인 아더 앤더슨사가 감사 핵심 서류를 파기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투자가와 직원들의 분노는 이제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 와중에도 자사 주식을 팔아 2억 달러를 챙긴 켄 레이 등 간부들은 지금도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궁금한 것은 어떻게 그렇게 큰 회사가 망하기 직전까지 수많은 투자가와 감독 당국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켄 레이의 뛰어난 수완이다. 텍사스 출신인 부시 사단은 물론 내로라는 정치인 치고 그의 돈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정계에 폭넓은 인맥을 갖고 있던 그의 이미지 메이킹 솜씨는 월 가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월가와 기업 간의 불순한 ‘증기(證企)유착’이다. 기업의 신주발행과 융자, 주식 투자 유치 등으로 목돈을 버는 월가의 증권 회사들은 기업에 대한 공정한 판단을 하기 어렵다. 문제점을 지적하는 분석가가 기피인물로 찍히는 것은 물론 그 사람을 고용한 증권사는 손님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자기 목을 걸고 불리한 보고서를 낼 용기 있는 인간은 월 가에 많지 않다.
월 가의 39명 증권 분석가 중 이 회사의 문제점이 드러난 석 달 전까지도 이 주를 팔라고 권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두 달 전 처음으로 한 사람이 투자가들에게 매각을 권고했으며 사태가 이 지경이 된 지금도 단 4명이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들 증권사가 엔론 주식을 발행해주고 받아 챙긴 돈만 2억 달러가 넘는다.
이 회사 장부의 신빙성을 감독하는 회계 회사도 마찬가지다. 감사 결과 여러 문제점이 드러났지만 앤더슨 사는 밝히기커녕 덮어두는 것도 모자라 회계장부 폐기를 명령했다. 5,000만 달러의 감사료에 눈이 멀어 이런 짓을 한 앤더슨은 5대 회계법인 자리에서 밀려날 위기에 처했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 앤더슨에 국한된 관행이 아니라는 점이다.
연방 법무부와 증권 감독원, 연방 의회가 대대적인 조사를 벌이고 있어 엔론 몰락의 진상은 머지 않아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진상 규명보다 더 시급한 것은 대기업과 증권사, 회계 감독 기관의 추한 삼각 관계를 제도적으로 차단하는 일이다. 돈으로 비리를 덮는 현행 관행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 제2, 제3의 엔론 출현에 놀랄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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