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남북화해와 협력, 통일의 길이 서서히 열려가고 있다. 평화공존, 평화교류가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평화통일이 민족사의 당면과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평화통일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제도가 같아져야 하고 제도가 같아지려면 이념이 같아져야 한다. 유물론(唯物論)과 유심론(唯心論)이 통합되려면 물심일원론(物心一元論)으로 합일이 되어야 하며, 극좌극우(極左極右)가 사라지려면 무극대도(無極大道)로 귀일되어야 한다. 통일논의는 이렇게 새로운 통일철학을 바탕으로 논의되어야 하고, 근.현대사의 주류가 무엇이며 무엇이 중심사상이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기든스(Anthony Giddens)도 21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모색으로 ‘제3의 길’을 주장한 바 있지만, 이제 인본주위(人本主義)와 신본주의(神本主義)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가 가고 새 3천년의 문명동진론의 인내천주의(人乃天主義)시대가 열리는 전환기를 맞이하여 ‘동학사상’을 중심으로 민족과 인류의 ‘평화통일의 정치철학’을 고찰해보는 것은 문명사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동학의 창시자 수운(水雲) 최제우는 "21자 주문(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을 알면 만권시서 읽어 무엇하리요"라고 했다. 그만큼 동학 속에는 동 . 서양의 많은 사상적 내용들이 함축되고 있다. 여기서 ‘평화통일의 정치사상’을 위해 21자 주문 속의 ‘지기(至氣)’와 ‘천주(天主)’의 개념을 화이트헤드의 ‘창조성’과 ‘신’과 연관지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수운은 구한말에 ‘서학’에 대하여 ‘동학’을 의식하면서 한국사상을 전개했다. 이는 뒤이어 동학혁명으로 발전한다. 그런데 동학혁명이 발발된 지 100여년이 지났지만 지금 나라의 형편은 수운의 그 당시와 달라진 것이 없다. 그리하여 다시 서구의 (신)서학과 비교하면서 동학의 그 현대적 의미를 음미해 보는 것은 시대정신에 부응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동학의 ‘지기’와 ‘천주’를 ‘비인격’과 ‘인격’의 말로 바꾸어 비교 고찰해 보기로 하자. 니체는 인격적이며 초월적인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동학은 신을 도리어 인격화하여 ‘천주’라고 했으며 서양과는 반대방향으로 나아갔다. 서양에서는 그 동안 기독교에 의하여 신이 너무 인격화해 있었기 때문에 비인격화할 필요가 있었고, 반대로 동양에서는 하(夏).은(殷).주(周)이래 인격신이 사라져버려 다시 인격신을 찾아 살려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19세기에 나타난 서양과 한국에서 나타난 상이한 두 방향의 신관(神觀)이라고 할 수 있다.
인격적인 신이 사망한 서양은 비인격적인 요소를 찾을 필요가 있었다. 니체는 그 작업을 해내지 못했다. 그러한 작업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사실상 가능해졌다. 하이데거, 틸리히의 ‘존재자체’같은 개념이 비인격적인 개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비인격적인 요소들이 서양전통에서도 ‘신성(Godhead)’이란 이름으로 고대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존재자체’, ‘신성’, ‘無’, ‘道’같은 개념은 기독교에 의하여 이단시되었으며 박해마저 받아왔던 것이다.
그러면 서양에서 교회가 사양길을 걷고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여기서 수운이 150년 전에 동경대전(東經大全)의 <논학문(論學文)>에서 서학과 서교를 비판하는 내용에 귀를 기울여 보자. 서학에 ‘기화지신(氣化之神)’이 없다는 말에서, 즉 기독교의 인격신관에 ‘기(氣)’가 빠져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기는 비인격적인 요소이다. 바로 서양정신에서 필요한 것은 인격신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기(氣)나 무(無)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서구화와 함께 전 세계가 지금 비인격적인 영성(靈性)에 목말라 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의 경우는 하(夏).은(殷).주(周)이후 인격신 상제(上帝)같은 존재는 사라지고 무(無), 도(道), 기(氣), 이(理)와 같은 비인격적인 개념들이 사상사의 주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한’에서 유래하는 ‘한울님’이란 이름의 인격신이 끊임없이 그 맥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삼국시대이후 주류사상사는 유교와 불교에 의해 지배되면서 인격신관이 위축되거나 배척되었고 주류에서 밀렸다. 그런 가운데서도 한국에서는 19세기 구한말 인격신이 동학에 의하여 다시 모색되었던 것이다. 동학에서는 인격신인 천주나 한울님을 비인격적인 지기(至氣)와 더불어 동시에 발견하여 동학사상의 중심개념으로 삼았던 것이다. 동양의 비인격적인 요소와 서양의 인격적인 요소를 절묘하게 조화를 시켜놓은 것이다. 화이트헤드도 ‘신’과 ‘창조성’을 동시에 발견하여 ≪과정과 실재≫라는 책을 내놓았다. 그 역시 인격과 비인격의 두 요소를 모두 살려내는 방법으로 신관의 새로운 탈출구를 찾은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동학의 한국민족주의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만나 ‘세계철학’으로 발돋움해 새 천년의 정치이념적 기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이 글은 김상일 교수의 「수운과 화이트헤드 : 동학주문 21자에 대한 과정철학적 풀이」책을 중심으로 서술되었음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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