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복 받은 나라의 하나를 꼽으라면 아르헨티나가 첫 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온난한 기후는 물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폭포로 불리는 이과수를 비롯, 스위스를 능가한다는 안데스 산맥 남단에 자리잡은 바릴로체 등 경관이 빼어난데다 남한의 30배에 달하는 국토에 전 남미를 먹여 살릴 수 있는 곡창지대가 펼쳐져 있고 엄청난 규모의 지하자원이 미개발 상태로 묻혀져 있다.
널찍널찍한 대로가 온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는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도시 모양이 아름다워 ‘라틴 아메리카의 파리’로 불리며 이곳이 고향인 탱고는 삼바와 함께 라틴 아메리카의 정열과 우아함을 상징하는 예술이다. 신문 구독률이 남미 제일일 정도로 민도도 높다.
객관적인 조건으로 보면 못 살 이유가 하나도 없다. 실지로 금세기 초까지 아르헨티나는 남미는 물론 서유럽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부국이었다.
이런 나라가 지난 주 사상 최대인 1,400억 달러에 달하는 외채를 갚지 못하겠다며 국가부도를 선언했다. 서구와 일본을 제외하고는 제3세계 국가 중 가장 먼저 선진국 문턱에 진입하려던 아르헨티나가 이 꼴이 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은 환 페론이다.
뮤지컬 ‘에비타’로 널리 알려진 에바 듀아르테의 남편이었던 그는 1946년 선거에서 이겨 대권을 잡은 후 ‘가난한 자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외국인 소유 기업을 몰수하고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나눠주는 선심정책을 폈다.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으나 잠시뿐 외국인 투자가들과 큰 손들이 아르헨티나를 빠져나가면서 경제는 급속도로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며 지지기반을 잃은 그는 1955년 쿠데타로 쫓겨난다. 1982년 영국과의 포클랜드 전쟁에서 져 축출될 때까지 수만 명의 자국민을 무자비하게 살해해 세계적인 악명을 떨쳤던 군부는 이렇게 아르헨티나 정계에 등장했다.
군부 집권 이후에도 계속된 실정으로 갈수록 나라가 망해가자 ‘구관이 명관’이란 국민들의 기대를 업고 페론은 1973년 다시 집권에 성공하나 일을 제대로 해 보기도 전 다음해 사망한다. 그의 두 번째 부인(일설에는 세 번째) 이사벨이 권좌를 이어 받지만 무능하기 짝이 없는 정치를 펴다 1976년 쿠데타로 역시 내쫓긴다.
경제난과 독재의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아르헨티나가 잠시 빤짝한 것은 1989년 페론당의 메넴이 집권하면서부터. 페론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아 선심위주의 정책을 펼 것으로 기대됐던 그는 취임하자 180도 입장을 바꿔 각종 규제를 풀고 외국인 투자를 적극 유치하는 등 시장주의 원리에 충실한 정책을 폈다. 그 결과 외국 자본이 몰려들고 경기가 되살아나면서 인플레는 연 5,000%에서 1%대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는 표면상의 변화일 뿐 권력 상층부의 부정부패와 중과세, 외국 자본에 대한 반감 등 페론주의의 뿌리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부패 일소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메넴 자신조차 권좌에서 물러나자 독직혐의로 체포되는 수모를 겪었다.
날로 늘어나는 외채를 감당치 못하고 IMF 권고에 따라 초 긴축 정책을 펴던 아르헨티나의 데 라 루아 대통령이 지난 주 성난 국민들의 시위와 폭동이 계속되자 사표를 내고 물러났다. 그는 가뜩이나 먹고살기 힘든 상황에서 IMF 말만 듣고 세금을 올리는 등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을 펴다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경제가 아무리 나빠져도 책임을 질 줄 모르는 많은 나라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귀감이 될만한 모습이나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그의 뒤를 이어 권력을 인계 받은 페론당도 어떻게 해야 나라를 살릴 수 있을 지에 대해 아무런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를 둘러보면 선진국 문턱까지 가는 나라는 많아도 이를 확실히 넘어선 나라는 소수다. 못 살던 나라가 갑자기 잘 살게 되면 잘 살게 된 원인을 분석하고 발전시켜 나가기보다는 그 동안 고생했으니 신나게 먹고 보자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한번 그 길로 접어들면 다시 정신을 차리고 허리띠를 졸라매기는 어렵다. 몇 년 후면 미국을 따라잡는다고 호들갑을 떨다 장기침체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이 아르헨티나의 전철을 보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