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축구 월드컵전망 거품빼고 다시보니...
98년 프랑스월드컵. 86년 멕시코 대회부터 4회 연속이자 통산 5번째 본선잔디를 밟는 한국축구의 지상과제는 바로 6개월 앞으로 다가온 2002년 한-일 월드컵에 걸어놓은 것과 자구 하나 오차없이 똑같았다. 본선 첫승과 16강 진출.
한국과 같은조에 편성된 3팀은 지금의 한국대표팀 사령탑 거스 히딩크가 이끄는 막강 오렌지군단 네덜란드와 86년 멕시코대회 4갈동풍의 주역 벨기에, 북중미의 호랑이 멕시코. 대진운을 탓할 건 없었다. 이웃 그룹들을 훑어보면 아무리 해도 비기기조차 버거운 팀, 잘하면 비길 수 있는 팀, ‘나는 날고 너는 긴다면’ 이길 수 있는 팀이 고루 섞여 있었다. 이같은 섞어찌개식 조편성(시드배정 및 순차적 조추첨)은 강자끼리 만나는 건 못막는다 해도 약자끼리 몰리는 것만은 피해 16강 무임승차를 차단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둘째 고개 네덜란드전을 사실상 포기하되 첫상대 멕시코를 무조건 격파하고 벨기에와의 최종전에서 최소한 무승부 이상 거둔다."
조추첨과 동시에 내려진 한국축구의 1승+16강 해법은 그것이었다. 목표 자체를 낮추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입이 여럿이면 무쇠도 녹인다고 했던가. 주문처럼 수없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그것들은 당연히 해내야 할 일이 돼버렸고 차범근 감독 등 태극전사들은 어느새 최선을 다해 이뤄내면 다행이고 못하면 역적으로 몰리는 상황이 됐다.
멕시코전 1대3 역전패, 네덜란드전 0대5 참패, 벨기에전 1대1 무승부. 차감독은 96년말 아시아선수권에서 자력8강 진출조차 실패하는 등 난파선이 된 한국축구를 떠맡아(97년 1월) 아시아 지역예선을 거뜬히 통과시킨 뒤 "대통령 차범근" 연호(당시는 97년 대선을 앞둔 상황이었음)까지 들었으나 네덜란드전 직후 불명예 퇴진, 대회도중 귀국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 펼쳐지는 상황 역시 비슷하다. 첫승과 16강 목표엔 변화가 있을 수 없고 해법도 판박이다. 네덜란드 대신 포르투갈을, 폴란드 대신 벨기에를, 멕시코 대신 미국을 집어넣으면 그만이다. 히딩크 감독을 점차 신격화(?)하는 것까지 닮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목표달성은 쉽지 않다. 무엇보다 객관적 전력상 그렇다.
지네딘 지단(프랑스)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축구스타 루이스 피구가 이끄는 포르투갈에 대해서는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다. 피구 말고도 누누 고메스·루이 코스타 등 월드스타들이 즐비하고 지난해 유럽선수권에서 잉글랜드와 독일이 포르투갈의 맹폭에 배겨나지 못했고 월드컵 지역예선에서는 네덜란드가 맥없이 무너졌다.
문제는 미국과 폴란드다. 특히 미국에 대해서는 한국이 통산전적(5승1무1패, 미국측 통계로는 미국이 한국을 이긴 적이 없음)에서 압도적 우위를 지킨데다 지난 9일 서귀포 평가전에서도 1대0으로 앞서 미국전 필승을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생겨나고 있으나 오산이다. 통산전적 자체가 미국에 프로팀 하나 없던 시절에 쌓인 게 대부분이다.
90년부터는 호각세다. 게다가 서귀포 경기때 미국은 간판스트라이커 어니 스튜어트 등 축구의 본고장 유럽무대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을 아예 제쳐놓는 등 차 떼고 포 떼고 치른 것이어서 제대로 된 평가전이랄 수조차 없다. 그러면서도 비가 내리는 가운데 벌어진 서귀포 경기에서 후반전에 미국이 한국을 밀어붙였다면, 또 한국이 모든 화력을 투입했는데도 1점밖에 내지 못했다면, 미국전을 따놓은 당상으로 여기는 것은 이만저만 착각이 아니다.
한국의 경우 유럽 어느나라의 2부리그에만 진출해도 경사난 것처럼 하지만 미국은 이미 국가대표중 5명이 잉글랜드와 독일에서 당당히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한국의 첫상대 폴란드는 훨씬 더하다. 국가대표 23명중 19명이 주로 분데리리가(독일 프로리그)에 포진하고 있다. 그나마 국가대표만 헤아린 숫자일 뿐 수십명이 유럽무대에 진출해 있다. 한국이 매우 싫어하는 파워축구를 구사한다는 점도 폴란드를 상대하기 버거운 이유중 하나다. 한국은 폴란드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체코를 상대로 한 평가전에서 0대5으로 참패한 바 있다.
경기스케줄(6월4일 폴란드전, 6월10일 미국전, 6월14일 포르투갈전)이 한국에 유리하다는 주장도 몽상에 그칠 우려가 있다. 거기에는 포르투갈이 2경기 모두 이겨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뒤 한국전에서 슬슬 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있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D조의 최강인 것은 확실하지만 스타일상 폴란드를 아주 껄끄럽게 여기고 있다는 점이 우선 걸리는 대목. 게다가 수비력에 관해서는 이탈리아 부럽지 않다는 소리를 듣는 폴란드가 한국전에서 무승부 이상 거뒀다면 포르투갈전을 비기기 작전으로 나서기 십상이고 그 경우 포르투갈의 창도 무뎌질 수밖에 없다. 결국 포르투갈은 한국전에서 총력공세로 나오게 된다는 얘기다.
포르투갈이 ‘기대대로’ 한국전 이전에 2승을 거뒀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피구·코스타 등 정예멤버들이 뛰면서 16강전 이후를 생각해 몸을 사린다면 좋겠지만 아예 이들을 빼고 벤치멤버를 기용한다면 한국으로선 더 골치아픈 상황을 맞기 쉽다. 피구나 코스타보다 못해 벤치멤버일 뿐 한국선수들보다는 확실히 앞선 이들이 천재일우의 ‘월드컵 공연’ 기회를 무성의하게 흘려보낼 리 만무다. 한국이 그동안 참패한 경기들을 뜯어보면 상대팀 주전들은 몸을 사리는 대신 모처럼 출장한 후보들이 때를 놓칠세라 펄펄 나는 바람에 일을 내곤 했음을 유의해야 한다.
결국 16강은커녕 1승도 쉽지 않은 게 내년 여름 월드컵 잔치를 개최하는 한국의 처지다. 한국축구가 히딩크체제 이후 질적으로 달라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본선 1승과 16강 진출을 편한 마음으로 얘기하기에는 남은 6개월이 너무나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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