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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타계한 투수 벨린스키의 삶, 여전히 화제
최근 향년 62세로 사망한 보 벨린스키는 60년대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투수로 명성을 날렸던 유명한 바람둥이였다. 수년간 방광암과 투병해 온 벨린스키는 얼마 전 라스베가스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벨린스키는 샌디 쿠팩스와 놀란 라이언이 등장하기 전, 로스앤젤레스 연고팀 투수로서는 최초로 노히트 노런 게임을 기록한 천재투수였다. 이를 통해 벨린스키는 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고, 그 또한 자신에게 쏟아지는 인기를 최대한 즐기며 살았다. 영화배우를 뺨치는 수려한 외모와 튀는 의상, 값비싼 보석치장 등 벨린스키의 일거수 일투족이 매스컴의 입맛에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벨린스키는 자신의 화려한 유명세와 넘쳐나는 끼를 바탕으로 할리웃에서도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다. 앤 마가렛, 티나 루이스, 코니 스티븐스 등 내로라 하는 미모의 여배우들과 끊임없이 염문을 뿌렸다. 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며 메미 밴 도렌과 약혼했다가 결혼도 하기 전 갈라섰다. 그 후 벨린스키는 플레이보이 잡지 모델 조 콜린스와 결혼에 골인하며, 플레이보이지에 의해 ‘1966년 올해의 플레이메이트’에 선정되었다. 하지만 콜린스와의 결혼생활도 얼마 못 가서 깨어졌고, 그 후 제지업계 상속녀와 재혼했다가 또 다시 이혼했다.
다채로운 그의 사생활은 호사가들의 입방아감으로는 안성맞춤이었으나, 재능 있는 천재투수의 커리어에는 치명타로 작용했다.
벨린스키는 8년간 메이저리그 경력에서 고작 28승을 거두는데 그쳤다.
벨린스키의 복잡한 사생활은 또한, 음주와 마약, 그리고 잦은 싸움으로 얼룩졌다. 이 같은 난장판 생활은 1976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의 후반기 인생은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알콜과 마약에서 해방된 후, 그는 라스베가스 소재 핀드레이 경영자문회사에서 일하면서 아동 야구교실을 운영했다. 또 1998년에는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독실한 펜타 코스탈 교회신자가 되었다. 로버트 벨린스키(보는 그의 애칭임)는 1936년 뉴욕시 맨해턴 다운타운에서 폴란드-러시아계 유대인 가톨릭 신자 부모 슬하에서 태어났다.
벨린스키의 아버지는 일일 막노동꾼으로 일하다, 나중에 뉴저지 트렌튼에서 TV 수리상을 차렸다. 성장기에 벨린스키가 처음 취미를 붙인 운동은 야구가 아니라 당구였다. 당구에 소질을 보인 벨린스키는 내기 당구로 큰돈을 따기도 했고, 싸움에 휘말려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벨린스키는 야구계에 뛰어들기가 무섭게 왼손잡이 강속구를 앞세워 단숨에 야구계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그가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의 주목을 끈 것은 1950년대 후반, 플로리다 펜사콜라 마이너리그 팀에서 뛰던 때였다. 벨린스키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메이저리그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어 1962년에는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가 볼티모어로부터 벨린스키를 영입했다.
에인절스 구단이 연봉 6,500달러를 제의하자, 벨린스키는 "내가 당구를 쳐도 그만한 돈은 벌 수 있다"며 연봉 8,500달러를 요구했다. 벨린스키가 팜 스프링스 소재 에인절스 훈련캠프에 합류하던 날, 캠프에는 스포츠 기자들이 떼거지로 몰려들었다. 당시 기자들은 연일 샌디 쿠팩스와 돈 드라이데일의 승전보 기사를 반복하는데 신물을 느끼던 차였다.
벨린스키의 혜성 같은 등장은 만년 다저스의 그늘에 가려 존재조차 희미했던 에인절스 팀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 때만해도 에인절스 구단은 문자 그대로 다저스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였다. 전용구장이 없는 관계로 모든 홈 경기를 다저스 구장을 빌려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1962년 5월2일, 다저스테디엄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벨린스키는 팬들에게 에인절스의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깜짝 쇼를 펼쳤다.
경기 전날 밤, 벨린스키는 선셋 스트립 바에서 만난 여성과 밤새 희희낙락거리다 다음날 정오쯤에야 간신히 눈을 떴다. 부랴부랴 다저스테디엄으로 달려간 그는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상대로 거침없이 강속구를 뿌려대며 노히트 노런 게임을 기록했다. 밤새 여자와 놀아난 선수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투구내용이었다.
당시 경기상황에 대해, 팀 동료였던 톰 모건은 이렇게 회고한다.
"노히트 게임을 몇 차례 경험했지만, 단 하나의 공도 제대로 맞지 않은 완벽한 노히트 노런 게임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벨린스키의 커리어는 그 날의 노히트 게임을 정점으로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노히트 게임을 기념하여 캐딜락 딜러에서 선물한 날렵한 붉은 색 캐딜락이 화근을 부채질했다. 벨린스키는 팀 동료이자 같은 플레이보이였던 딘 챈스와 함께 캐딜락을 몰고 할리웃을 쏘다니며 여배우 사냥에 전념했다.
노히트 게임 이후 벨린스키는 5연승을 거두며 한동안 무패가도를 달리는가 싶더니, 결국 1962년 시즌을 10승11패의 평범한 성적으로 마감했다. 다음 해부터는 그의 야구 커리어의 마감기였다. 1963년 시즌, 벨린스키는 초반 2승9패의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다, 급기야 64세의 스포츠 기자 브레이븐 다이어를 떼려 눕히는 사단을 내고 말았다.
그 후 벨린스키는 필라델피아, 휴스턴, 피츠버그, 신시내티 팀 등을 전전한 끝에 1970년 돌연 은퇴했다. 그 후 더 이상 마운드에 선 벨린스키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플레이보이로서의 그의 명성은 계속되었다.
팬들은 길지 않았던 그의 야구 커리어보다는 벨린스키의 노히트 노런 게임과 플레이보이로서의 이미지를 더 오래 기억했다.
벨린스키의 야구인생과 관련, 한 야구평론가는 말한다.
"벨린스키는 백만불짜리 황금어깨를 가졌으나, 머리가 10센트짜리밖에 되지 않았다. 만일 그의 머리가 어깨를 따라줬다면, 벨린스키는 틀림없이 명예의 전당에 올랐을 선수다. 그는 최고 투수로서의 자질을 모두 갖추었지만, 한번도 최고가 되고자 노력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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